[취재파일] 푸른 눈의 이몽룡…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발레 춘향'에

"한국인 몽룡은 아니지만, 예술엔 경계가 없죠"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작성 2019.10.07 09:2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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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몽룡.

유니버설 발레단의 '발레 춘향'을 다룬 많은 기사들이 이 제목으로 나갔습니다. '발레 춘향'에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가 객원 주역으로 출연했기 때문입니다. 쉬클리야로프는 뛰어난 테크닉뿐 아니라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이름난 무용수입니다. 그는 몽룡 역을 맡아, 춘향 역을 춤춘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과 호흡을 맞췄습니다.

발레 춘향은 유니버설 발레단이 2007년에 초연한 창작발레입니다. 유니버설 발레단 유병헌 예술감독 안무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썼습니다. 전 국립무용단장 배정혜 안무에 케빈 픽카드가 작곡한 음악으로 초연됐지만, 몇 차례 개작을 거쳐 지금의 버전으로 완성됐습니다. 유병헌 감독은 차이코프스키의 만프레드 교향곡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명곡들을 들으며 굿거리장단 같은 한국적 색채를 느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019 춘향_ 1막 초야 ⓒ 유니버설발레단 (사진=김경진)쉬클리야로프는 지난해 유니버설 발레단의 '스페셜 갈라' 공연에 초청받아 '로미오와 줄리엣' 중 2인무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당시 갈라 무대에서 그는 강미선-이현준의 '춘향' 초야 2인무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고, '발레 춘향' 전막 공연 출연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고 합니다. 그는 춘향이 '높은 수준의 클래식 발레 작품'이라며, 공연의 퀄리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발레 춘향이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연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닮았다고 했습니다. 또 '정의가 악을 물리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제가 한국인이 생각하는 몽룡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예술에는 한계, 경계가 없잖아요. 무용수로서 제가 가진 최대치를 끌어내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책을 읽고, 한국인 무용수와 교류하면서 한국적 정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쉬클리야로프와 호흡을 맞춘 춘향 역의 강미선은 같은 발레단 수석무용수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부부지간입니다. (2013년 노보셀로프는 강미선과 함께 출연했던 '호두까기 인형' 커튼콜에서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관객의 박수 속에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했죠. 당시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iB1ei0Zjec) 그런데 노보셀로프는 쉬클리야로프와 바가노바 발레 학교에서부터 함께 공부했던 친구라고 합니다. 쉬클리야로프는 강미선-노보셀로프 부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강미선은 쉬클리야로프가 무대 경험 많은 파트너라 처음이지만 호흡 맞추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며 표현력이 워낙 좋아서 같이 춤추는 자신도 더 표현이 풍부해지는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2007년 초연 당시 군무로 시작해 지금까지 '발레 춘향'에 여러 차례 출연했던 강미선은 쉬클리야로프가 이전의 파트너와 어떻게 다른지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전에는 제 남편인 콘스탄틴, 그리고 이동탁, 이현준과 춤췄어요. 쉬클리야로프가 저한테 네 번째 몽룡이죠. '춘향'은 아시다시피 한국적 발레예요. 한국무용에서 볼 수 있는 춤사위가 등장하죠. 외국인 무용수들은 처음에는 어떤 느낌인지 모르고 이런 동작을 그저 따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또 한국문화에서는 절제를 중요시하잖아요? 그래서 감정을 다 터뜨리지 않아요. 발레에서는 표정이나 몸짓 등 여러 방법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외국인 무용수들이 감정을 더 크게 표출하는 것 같아요. 이동탁 씨가 절제되고 보듬어주는 몽룡이라면, 블라디미르는 감정표현이 더 크고 적극적이죠. 두 무용수의 다른 표현을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2019 춘향_ 2막 과거 2 ⓒ 유니버설발레단 (사진=김경진)쉬클리야로프는 프로답게 열흘 남짓한 연습기간 동안 완벽하게 작품을 소화해 무대에 올랐습니다. 과연 감정이 풍부한 몽룡이었어요. 초야의 2인무에서 두근거림과 설렘, 사랑의 환희가 잘 표현되었다면, 재회의 2인무에서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먼저였고,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만난 기쁨이 잘 드러났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부채와 붓 같은 소도구를 들고 추는 춤이 많아서 적응이 힘들었다고 했는데, 이런 장면들이 한국적인 색채를 물씬 풍겼습니다. 몽룡이 붓을 휘두르며 '일필휘지'를 표현하는 과거 시험 장면, 부채를 쫙 폈다 접었다 하면서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푸른 눈의 몽룡'이 화제가 된 건 지금까지 보기 어려웠던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고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누구나 다 아는 한국인 캐릭터 '몽룡'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연기했으니까요. 외국인이 어떻게 한국인 캐릭터를 연기하냐고요? 발레 춘향은 한국적 색채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발레 테크닉과 형식이 주가 되고, 보편성을 가진 사랑 이야기이죠. 더구나 발레는 대사가 없으니 언어의 장벽도 없잖아요.

발레 춘향을 보면서, 지난 2017년 베이징에서 봤던 한국 창작 뮤지컬 '빨래'의 중국 라이선스 공연을 떠올렸습니다. 중국인 배우들이 서울의 달동네 배경 그대로, 한국 이름 그대로, 다만 대사만 중국어로 바꿔서 연기하더군요. '한국어 참 어려워요' 같은 대사를 중국어로 들으니 신기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레미제라블'이나 '오페라의 유령' 라이선스 공연들도 역시 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 아니던가요.

한국인이 발레 '백조의 호수'의 지크프리트 왕자를 춤추는 것처럼, 러시아 무용수가 발레 춘향의 몽룡 역을 춤추는 것도 가능한 시대가 됐습니다. 쉬클리야로프의 말처럼, 예술에는 경계가 없죠. 발레 춘향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6일에서 8일까지 열렸습니다. 이번 공연은 끝났지만, 또 이런 무대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한국의 창작 발레 레퍼토리가 정말 많아진다면, '푸른 눈의 몽룡'이 더 이상 큰 뉴스가 되지 않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