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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촬영감독 "136편 중 50편은 부끄럽지만…내겐 교과서"

정일성 촬영감독 "136편 중 50편은 부끄럽지만…내겐 교과서"
'충무로의 촬영 거장'인 정일성 촬영 감독이 62년 영화 역사를 회고했다.

4일 오전 부산의 한 백화점 문화홀에서 열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일성 촬영 감독은 회고전의 주인공이 된 소감을 묻는 질문에 "부산국제영화제 시작 전에 주변 지역에서 태풍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럼에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주변 분들이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운을 뗐다.

정 감독은 62년의 영화 인생을 돌이켜 보며 회한에 젖은 듯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됐고, 해방되자마자 무정부 상태가 됐다. 대학시절엔 학교 문도 거의 닫혔다. 그리고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도 지켜봤다. 그런 경험들이 영화를 하는데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긴장 속에 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였기에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영화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신 무장을 했다. 불행했던 근대사가 제가 지금까지 일하는 원동력이다.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것이 영화에 많은 도움이 됐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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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성 촬영 감독은 1957년 조긍하 감독의 영화 '가거라 슬픔이여'로 데뷔해 62년간 한국 영화를 만들어왔다. 김기영 감독, 이두용 감독, 임권택 감독 등과 호흡을 맞추며 1970~90년대까지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그는 "이제까지 총 136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그중 50편 정도는 부끄럽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다. 대표작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젊을 땐 겁 없이 흥행하고 상 받은 영화도 만들어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 찍은 50편의 작품이 저에게 교과서처럼 도움을 줬다."라고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남겼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일성 촬영 감독의 회고전 상영작으로 '화녀', '사람의 아들', '최후의 증인', '만다라', '만추', '황진이', '본 투 킬'까지 총 7편을 선정했다.

정일성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밝혔다. 그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영화를 찍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멋진 영화들이 나온 것들이 자랑스럽다. 신상옥 감독의 작품들, 김수용 감독의 '만추' 같은 영화도 나왔다. 또 김기영 감독의 '화녀', '하녀' 이런 영화들도 나왔다. 이후 임권택 감독이 나와서 같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작품들은 꼭 제가 하지 않았더라도 꼭 기억해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 감독을 꼽는 질문에는 봉준호 감독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영화 100년이 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로 칸에서 상을 받은 건 개인적으로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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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정일성 감독은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그는 "요즘은 필름을 보지 않는 사람이 디지털로 촬영한다고 하더라.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도 필름도 건너뛰고 디지털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필름을 하는 사람들이 골동품 취급당하기도 한다."면서 "디지털을 하더라도 아날로그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할 수 없다. 그걸 건너뛴 작업물은 뭔가 아쉽다. 저는 영화과 출신도, 영화 전공자도 아니지만 현장으로 몸으로 익힌 후 독학으로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 학도들은 이론과 현실에 혼란이 올 수 있다. 그걸 지혜롭게 넘기면 좋은 촬영감독, 영화감독이 되지 않을까."라고 조언했다.

62년 외길 영화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는 자신만의 원칙을 꼽았다. 그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리얼리즘 안에 꿈을 담으려 했다. 그게 제가 지금까지 일을 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오랜 영화 동지인 임권택 감독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도 드러냈다. 두 사람은 1979년 '신궁'(1979)으로 만나 '만다라'(1981)로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 한국 영화의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 칸영화제 경쟁 진출에 이은 감독상 수상 등 한국 영화의 새 역사를 썼다.

정일성 촬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에 대해 "제가 직장암에 걸려 쓰러져 있을 때 저를 다시 일으켜준 사람이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워했다.

이어 "저보다 몇 살 아래지만 사회나 역사나 미래를 생각하는 것들이 거의 일치했다. 너무 오래 해서 매너리즘에 빠져 서로에게 독이 될 수도 있던 시기에는 헤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만났다. 좋은 카메라로 찍고 싶어서 '황진이'를 찍었다가, '장군의 아들'로 다시 만났다. 처음에 만난 것처럼 자신의 세계를 감독과 토론을 통해 영화를 해나가려 했다. 이젠 서로 젊은 연출자, 젊은 촬영감독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서로의 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했다.

한국 영화의 힘으로는 다양성을 언급했다. 정 감독은 "예전엔 영화에 국적이 있었는데 요즘엔 없어진 것 같다. 다만 미국 영화 아류 같은 작품이 나오는 건 걱정되는 부분이다."라고 우려를 밝히기도 했다.

더불어 "아류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영화 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자신만의 노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정일성 감독 회고전은 오는 12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선보여진다.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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