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간첩 조작 기술자와 피해자들 ② -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김민정 기자 compass@sbs.co.kr

작성 2019.10.02 13:47 수정 2019.10.02 17:1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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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황해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다 북한에 피랍됐던 승룡호 선원 고 서창덕 씨.

4개월 만에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국가는 17년이 지난 뒤 '북한에서 무사히 돌아온 죄'를 물어 서 씨를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혐의도 없이 체포 돼 가혹행위와 고문을 당한 뒤 보안대 직원이 쓴 "나는 간첩이다" 진술서에 지장을 찍습니다. 이 '자백'을 토대로 법원은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감옥에 갔을 당시 서 씨에겐 결혼한 지 3년 된 아내, 돌쟁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일흔이 된 그 때 그 아내, 장성한 아들은 잃어버린 지난 시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최옥선 씨/납북어부 고 서창덕 씨 아내
"너무 어렸어요. 집에서 애들만 키우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집에 안 돌아오는 거예요. 남산으로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때부터 4만 원짜리 방 한 칸 구해서 몇 달 살다가 소문 나면 쫓겨나고, 소문 나면 쫓겨나고. 다방 일 구하면 형사가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어 잘리고, 식당 일 구하면 또 어디에서 험악한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 잘리고 그렇게 십 년이었어요."


아들은 오랜 세월 아버지를 원망했습니다.

서진석 씨/납북어부 고 서창덕 씨 아들
"동네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았어요.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간첩 자식이라고 때리고, 애들은 빨갱이라고 때리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때리고. 나쁜 길로 빠진 적도 있었죠. 아버지는 대체 왜 간첩질을 했을까. 아버지 출소하고 나서도 미워서 안 보고 살았어요."


서창덕 씨는 결국 가족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혼하면 따라다니지 않겠다는 당국의 말에 아내는 이혼 도장을 찍고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새벽하늘 보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노을 질 무렵 가족에게 돌아가던 어부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겁니다.

국가는 지난 2008년, 24년 만에 서 씨에 대해 재심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경찰과 안기부 직원들이 고문과 강압수사로 모든 증거를 꾸며냈다"고,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은 가해자가 다름 아닌 국가라는 사실을 늦었지만 법적으로 확인해준 겁니다. 서 씨는 오래도록 인연을 끊고 지냈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누명을 벗었다. 그동안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는 지웠지만 빼앗긴 계절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출소한 뒤 자신의 책임이 아닌 고통을 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고문을 잊으려 술에 의존했고, 시시때때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아픈 기억이 있는 고깃배에 다신 오르지 못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며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며 그날의 삯을 벌어 산 세월이 20년. 무죄 판결로 떳떳해진 뒤 오래 그리던 아들을 다시 만났지만 부자가 함께 목욕탕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서 씨는 지난해 눈을 감았습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인이 박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몇 장짜리 무죄 판결문이 아닌, 이들이 겪어야 했던 긴 고통의 과정에 대한 국가의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가까이서 채록한 전문가는 말합니다.(한성훈 연세대 역사와공간연구소 연구교수, '국가폭력과 반공주의') 제대로 된 사죄, 그리고 간첩조작에 적극 가담한 사람에 대한 철저한 처벌로 불의의 세월을 바로잡겠다는 국가의 약속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국가는 여전히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엄격하고 가혹했습니다. 정부는 상훈법에 근거한 서훈 취소 권한을 가졌지만, 간첩 조작으로 훈장 받은 공무원들의 서훈을 취소하기 위한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모두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행정안전부 상훈과
"피해자가 재심 무죄 판결문과 근거 자료를 제출해야 서훈 취소를 검토할 수 있다. 피해자 요청 없이 정부가 일일이 찾아서 취소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법원이나 법무부에 판결문이나 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 없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다른 부처에 자료 요청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 정당한지 구태여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법적인 서훈 취소 권한을 가진 행정안전부가 관계 부처에 협조 공문을 보내 자료를 받는 게 어렵다는 말,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정 어렵다면 시스템을 마련하는 법 개정안을 지금껏 내놓지 않은 것도 의아합니다.
김민정 취재파일_간첩 조작 관련 캡처주먹구구로 서훈 취소 작업을 하다 보니 고 서창덕 씨 사건의 경우 서훈 취소 검토 대상에서 누락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간절히 바랐지만 서 씨는 자신을 고문한 공무원들이 받은 훈장이 취소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SBS 이슈취재팀에서 취재를 시작하자 정부 측은 피해 가족에게 전화해 "피해자가 판결문을 제공해주지 않아서 검토를 못 했다"고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정부의 보다 공식적인 입장과 설명을 듣기 위해 상훈 업무를 총괄하는 최승현 행정안전부 의정관에게 3일에 걸쳐 비서실과 개인 휴대폰으로 스무 통 가까운 전화를 걸었고, 고문 피해자와 관련한 취재 내용을 알리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통화를 할 수도, 답장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역 행사에 참석하느라 바쁘신 것 같다"고 3일째 되던 날 비서실에서 한 마디 전해왔는데, 국가폭력 피해자 문제는 여전히 정부 고위 공무원에게는 우선순위 저 아래로 밀려나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SBS 보도 이후 행정안전부에서 서훈 취소 시스템을 개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재심 무죄 판결이 나오면 관계 기관으로부터 자동 통보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관련 법 개정안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고 서창덕 씨 사건에 연루된 공무원에 대해선 빠른 시일 내에 서훈 취소 작업을 하겠다고 밝혔고, 훈장과 상패 회수 작업도 속도를 내겠다고 했습니다.
▶ 행안부, SBS 보도 이후 "서훈 취소 시스템 개선하겠다"

이것만으로 지난 30년 세월이 보상 받는 것도 아닐 텐데, 서진석 씨는 "아버지 일에 관심을 가져 줘서 감사하다.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다"고 전화기 너머로 웃어 보였습니다.
김민정 취재파일_간첩 조작 관련 캡처정부가 약속을 지키는지, 과거 국가가 저지른 불의의 역사를 오늘날의 국가가 기억하고 청산하는지 끝까지 지켜보고, 또 기록하겠습니다.

▶ [취재파일] 간첩 조작 기술자와 피해자들 ① - "나를 고문한 자를 마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