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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난은 죄'였고 그들은 사람이 아닌 '불량인'이었다

5·16 쿠데타 세력이 저지른 국가 폭력, 국가 기록으로 확인

'가난은 죄.' 지금도 가난은 차별과 불평등의 동의어로 받아들이며 누군가에겐 형벌과 다를 바 없다. 60년 전 그 시절의 가난은 말 그대로 '죽을 죄'였다. 가난했기에 끌려갔고, 가난했기에 '불량인'으로 취급됐다. 5·16 쿠테타 직후 국가가 작성한 공식 문건에서 드러난 사실들이다.

국방부에서 보관하다(국가기록원 이관) 여태껏 공개된 적 없던 이 문건은 1960년대 박정희 쿠테타 세력이 '사회의 부패와 구악 일소'라는 혁명공약 아래 자행한 국가 폭력의 흔적을 여과없이 기록하고 있다. 24페이지 분량으로, 1961년 7월 5일부터 약 2주간 계엄군, 국방부, 내무부(현 행안부) 등 국가기관이 주고받은 문서다. 민주당 권미혁 의원실을 통해 입수했는데, 문건엔 당시 국가 주도의 소위 '부랑자 이주 계획(실제론 강제 이주) 및 결과'가 포함돼 있다.

● 그들은 사람이 아닌 '불량인'이었다.

문건의 표현을 빌리자면, 1961년 군사정권에게 부랑자는 '불량인'이었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불량인 이주 정착>
"불량인 이주 정책에 관한...조치 결과를 조속히 통보 바람"

_4294년(당시엔 단기로 기재·이하 1961년) 7월14일 문건 中

5·16 군사정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61년 7월 14일 작성된 문건의 제목은 '불량인 이주 정착'이다. 국방부 군수참모부장이 수신인으로 된 문건에선 '불량인' 이주 계획을 기록해두고 있다. 그리고 이주 계획 지시자의 실체는 나흘 전 1961년 7월 10일 작성된 문건에 정확히 적혀있다.

<서울시내 부랑인 이주 정착 사업지원>
"국가최고재건회의 방침에 따라 계엄사령부 주관으로 실시하며...적극 협조하기 바랍니다"

_1961년 7월 10일 문건 中

5·16 쿠테타 세력이 입법·행정·사법 3권을 가진 초헌법적 기구 '국가최고재건회의'를 만들자마자 수도 서울의 부랑자 일소부터 나선 것이다. 서울시내 부랑자를 강원도 평창군으로 이주시킨다는 명분 아래 군사작전과 다를 바 없는 계획은 순식간에 진행됐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문건에 따르면 '서울특별시에서 수집해 임시 보호 중인 걸인 중 근로 능력이 있는 남자 450명'을 이주 대상으로 삼았다. 물건과 다를 바 없이 '수집'된 걸인 450명은 1961년 7월 12일 05시 출발, 같은 날 18시 황병산(강원도 평창군) 도착, 청량리역까진 군용차, 청량리역에서 원주역까진 유기화차(기차), 원주역에서 다시 황병산까진 군용차량으로 이송됐다.

450명의 과업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일대 약 200만 평 개척 사업'이다. 부랑자 가운데 자원자를 이주 대상자로 삼았으며 '개척지는 국유지, 일정 개간지는 분배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고 문건은 말하고 있다.

자유 박탈, 수용, 노동 인권유린 이유…"유익한 국민이 되게 한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근로능력이 있는 부랑자를...유익한 국민이 되게 한다"
_1961년 7월 5일 문건 中


1961년 국가는 부랑인 이주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부랑인은 이등국민이자 불량인이었고, 노동을 통해 '유익한 국민'으로 탈바꿈 시킬 존재였던 셈이다. '교화 대상'인 범죄자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국가기관 전체가 동원됐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국유림 사업 허가: 농림부
집단이송 사전 준비: 서울특별시
집단 수송: 국방부, 교통부
수용소 설치 및 운영관리: 내무부, 국방부
경호 및 단속: 국방부, 내무부
정착사업 실시에 대한 보도: 공보부
_1961년 7월 5일 문건 中


"수송 당일 현지 도착까지 헌병으로 경호해 줄 것…
현지 도착 후 이탈 방지를 위해 경비 해 줄 것"

_1961년 7월 5일 문건 中

문건을 보면 생활공간을 수용소로 표현, 자유를 박탈한 사실을 자인하고 있다. 탈출을 막고자 군까지 동원했다는 점도 드러난다. 대관령으로 옮겨진 이들은 '부랑자'라는 뜻과 정반대로 울타리에 감금된 동물처럼 취급당했고,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제대한 군인 또는 현직 군인들의 '집단 지도체제' 아래서 '단체생활'을 강요당했고, 지도자의 말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였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집단 지도체의 방침에 순응하여…자활체제를 구비해야 한다"
"선량한 국민으로서 자각과 노동정신을 배양하고…노동작업에 종사해야한다"
"경비를 위해 경찰을 배치하되 필요 시에는 군 배치를 의뢰한다"

_1961년 7월 5일 문건 中

군용차에 실려 객지로 강제 이송된 이름 모를 450명은 공권력의 감시 아래, '선량한 국민'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인권 유린을 당한 사실이 국가 기록으로 증명된 것이다.

● '가난을 죄'로 규정한 국가…국가 기록으로 확인된 국가 폭력

문건은 이송 직전과 직후에 작성됐기 때문에, 대관령으로 이송 된 필부(匹夫)들의 구체적 피해와 고통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대관령 이주와 매우 흡사한 '서산개척단' 사건을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7월 12일 부랑자(로 칭한) 450명을 대관령으로 이주 시키고 몇 달 뒤, '대한청소년 개척단'의 이름으로 서산 일대 개간 사업을 진행했다. 대관령 이주 문건에 나오는 방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구두닦이, 넝마주이, 부랑자 등 사회적 약자들은 국가에 의해 '이등국민, 교화 대상'으로 취급당한 채 서산 작업장에 갇혔다. 단체 생활의 명분 아래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그들의 삶은 산산조각났다.

서산 황무지는 옥토로 바뀌었지만, 약속했던 개간지 분할은 이뤄지지 않았다. 앞서 문건에서처럼 개척지는 국가 소유였기 때문이다. 국가에게 비옥한 땅을 받치기 위해 사망자는 속출했고, 피해자들은 굶주림 속에 시체를 옆에 둔 채 밤을 지새웠다.

피해자들의 절규로 서산개척단 사건은 최근 공론화가 됐지만, 국가는 외면하고 있다. 국가 폭력은 광범위하고 자의적이며 무법적으로 자행되지만, 국가를 향한 책임 요구는 법에 따라 까다롭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국가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는 이유다.
권지윤 취재파일_부랑아 작전 문건
오늘 공개된 문건을 보면, 더 이상의 외면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가난을 죄'로 규정했던 건 국가였고, 강제 이송시킨 채 자유를 박탈한 것도 국가라는 사실을 문건이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국가가 답할 차례다.

(자료제공: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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