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간첩 조작 기술자와 피해자들 ① - "나를 고문한 자를 마주보고 싶다"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작성 2019.10.02 13:20 수정 2019.10.02 13:4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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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살 김순자 씨는 복날 더위에도 털 이불을 싸매고 잠을 잡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무게를 달아도 알 수가 없고 크기를 재 봐도 알 수가 없을 것 같은 추위"가 찜통 여름에도 밤이면 밤마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40년 전, 세 아이의 엄마로 살던 김순자 씨를 '빨갱이 가족단'이라며 하루아침에 남영동으로 끌고 가 얼음통에 넣은 사람들. 아침마다 이불을 싸맨 채 땀범벅이 되어 일어나는 김순자 씨는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얼굴 보고 싶어요. 나와 정면을 마주보고 싶어요. 그 사람들 만나, 지금 만나면요 쳐다보고 웃고 싶어요. 어느 때는, 아, 내가 저 놈들 원수를 어떻게 갚아? 이랬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들도) 너무 불쌍하죠."

함께 남영동으로 끌려갔던 김순자 씨의 동생도 방망이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고, 척수에 전류를 흘렸던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출소 몇 년 뒤부터 자꾸만 소지품을 놓고 다니자 가족은 답답한 마음에 없는 살림 털어 총명탕을 지어먹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외상성 치매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고 합니다. 김순자 씨는 난곡동 반지하 방구석에서 총명탕 지어먹인 스스로를 탓하며 울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 간첩 조작 · 고문했던 53명 '훈장 취소', 아직 회수 안 됐다

40년 만에, 이들의 이름이나마 알 수 있게 될 기회가 지난달 찾아왔습니다. 행정안전부는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민주당 홍익표 의원 등 시민사회와 국회의 문제제기로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간첩 조작 가해자들의 훈장을 취소했는데, 9월 안으로 이들의 명단도 공개하겠다고 발표한 겁니다. 그러나 9월의 마지막 날까지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경찰, 국정원, 국방부 등 서훈 취소자들의 예전 소속기관들은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수 있고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SBS 이슈취재팀은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수 있다'며 공개하지 않고 있는 이들의 명단을 입수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게 정말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인지 따져보기 위해, 이들 이름과 재심 판결문을 대조해 이들의 과거 행적을 살펴봤습니다. '이들도 시대의 피해자일 수 있지 않을까? 상부에서 시킨 지시를 공무원으로서 이행하다 보니 생긴 일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의 과거 행적은 이런 고민들을 무색케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ㅇㅇ / 前 국군501보안부대 군사법경찰관
- 잘못된 범죄 사실과 증거를 기초로 '정삼근 간첩 조작사건'의 공소 제기
- 당시 민간인 수사 권한이 없었지만 안기부가 수사한 것처럼 허위로 공문서를 꾸밈
- 영장 없이 정삼근 등 민간인을 체포해 52일 동안 구금
- 협박과 고문을 자행하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상해를 입힘
- 허위 자백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폭행과 협박

김ㅇㅇ / 前 전주 501보안대 대공과장
- 1984년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 1985년 정삼근 간첩 조작 사건 조사 지휘
- 1989년 국군보안사령부 방첩처 방첩2과장으로 재직하며 민간인 사찰과 요주 인물 예비 검거 계획인 '청명계획' 입안, 수립.

김ㅇㅇ / 前 보안사 수사관
-구명서 간첩 조작 사건 수사 담당 수사관

장ㅇㅇ / 前 보안사 수사관
-구명서 간첩 조작 사건 수사 담당 수사관

서ㅇㅇ / 前 107보안대 수사계장
-민간인 수사권 없이 민간인 이병규를 불법 수사한 뒤 안기부 수사관이 수사한 것처럼 공문서 위조
-이병규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기 위해 증인들에게 허위 증언 수고비로 30만 원 지출, 일부는 석탄공사 주재원을 하게 해 준다며 회유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로 민간인들의 엉덩이와 등을 때리며 진술서를 작성하게 함

심ㅇㅇ / 前 보안사 소속 6급 수사관
-구명우 간첩 조작 사건의 첫 인지 보고서 작성
-이후 구명우 간첩 조작 사건 수사 담당

성ㅇㅇ / 前 안기부 1국 수사관
-1982년 '송씨 일가 간첩조작사건' 당시 민간인 송기준 수사 담당
-간첩 조작 피해자 송기준은 '성 씨가 몽둥이찜질, 전기고문 등 수십가지 고문 방법으로 괴롭혔다'고 증언
-1983년 '차풍길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 임의동행으로 민간인 연행해 66일 동안 영장 없이 수사.
간첩조작사건 서훈 취소자 명단간첩조작사건 서훈 취소자 명단간첩조작사건 서훈 취소자 명단간첩조작사건 서훈 취소자 명단▶[자료 1] 행안부가 지난해 훈장을 취소한 군인,경찰,공무원들의 명단과 재심 판결문 등에서 확인되는 이들의 과거 행적. 이들은 소극적으로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만들기 위해 주변인들을 회유하고, 폭행과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여러 건의 간첩 조작사건에 관련된 이들도 있다.

원종진 취재파일_간첩 조작 사진 5▶[자료 2] 행안부가 올해 추가로 훈장을 취소한 이들의 명단. 김순자 씨 일가족을 끌고가 고문한 이들은 그해 보국훈장을 받았다. 37년 뒤, 사건은 허위로 밝혀졌지만 이들이 받은 훈장도, 연금도 모두 회수되지 않은 상태다.

한 건도 아닌, 여러 건의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 수많은 이들의 삶 자체를 무너뜨린 사람들. 상부의 명령에 소극적으로 복종한 것을 넘어, 직접 수십 가지 고문 방식으로 무고한 사람들의 몸을 부수고 정신을 무너뜨린 사람들. 이 외에도 아직 정확히 행적이 조사되진 않았지만,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은 여전히 역사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흉악범들도 예외 없이 세상에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경찰이 위원회를 열어 흉악범들의 명단을 공개할지 말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달리, 이들 간첩 조작 가해자들의 명단 공개 여부는 제대로 된 논의 없이, 관계 기관들의 폭탄 돌리기 속에서 차일피일 결정이 미뤄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뒤로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수차례 다짐한 국가 기관들. 이들이 '국익'이라는 이름 뒤로 숨는 걸 피해자들은 언제까지 지켜봐야만 할까요? 김순자 씨의 동생은 지난해 10월, 연명치료를 받던 끝에 일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취재파일] 간첩 조작 기술자와 피해자들 ② -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