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트럼프 머릿속에 북한은 4번째?

유엔 총회 연설문으로 본 미국 대외정책 우선 순위

손석민 기자 hermes@sbs.co.kr

작성 2019.09.26 09:09 수정 2019.09.26 15:3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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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었다는 말대로 일까요? 북미 비핵화 협상 재개와 관련해 기대를 모았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 24일 유엔 총회 연설이 딱 그 속담대로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 연설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곧 만날 수도 있다"며 바람을 잔뜩 잡은 터였습니다. 하지만 연설문에는 "비핵화 시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란 원론적인 언급만 담겼을 뿐, 체제 안전 보장이나 제재 해제 등 북한의 관심사에 대한 진전 사항은 물론 트럼프 스스로 제시했던 '새로운 방법'에 대한 추가 설명도 없었습니다.

연설문 분량에서도 대북 정책은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선순위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부분은 중국과의 무역 분쟁이었습니다. 전체 35분의 연설 시간 가운데 4분 반 동안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지적하면서, "나쁜 합의는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은 약속된 개혁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대규모 시장 장벽, 과도한 국가 보조금, 환율 조작에 의존한 경제 모델을 채택했다"며 직격탄을 날린 뒤 "이런 시대는 끝났다"고 경고했습니다. 중국이 내정 간섭이라며 예민하게 여기는 홍콩 사태까지 언급하며 "미국은 홍콩의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고도했습니다. 다음 달 미중 고위급 무역 협상 재개를 앞두고 중국을 한껏 압박하겠다는 속셈을 내보인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다음으로 지목한 나라는 이란이었습니다. 중국과 비슷하게 4분여 동안 이란을 정조준하며, 최근 사우디 소재 석유 생산시설 공격이 이란 책임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국가는 행동할 의무가 있다"며 "책임 있는 어떤 정부도 이란의 유혈 충동(bloodlust)을 보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이란에 대해 최고 수준의 제재를 부과했다"며 각국에 대 이란 압박 동참을 촉구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다음으로 베네수엘라를 지목한 뒤 마두로 정권의 폭정을 맹비난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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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분량 상으로는 중국과 이란, 베네수엘라 다음 순위로 등장했습니다. 직접 관련된 문장으로는 4문장, 시간으로는 50초 남짓이었습니다. 내용도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누구든 전쟁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가장 용기 있는 자만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안다"고 전제한 뒤 "이런 이유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담한 외교를 추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는 김정은에게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을 말했다. 이란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엄청난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북한은 비핵화해야 한다"며 김 위원장의 결단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목표는 화합이며 결코 끝나지 않는, 끝없는 전쟁을 이어가지 않는 것"이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적성 국가인 북한도 미국의 우방으로 바뀔 수 있으며 체제 안전 보장은 물론이고 경제 번영까지 얻을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도, 이를 위해선 비핵화가 필요하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거듭 강조한 겁니다. 하지만 북미 양측 모두 조만간 재개할 거라고 한 실무 협상을 앞두고 북한이 기대했을 법한 '새로운 셈법'에 대한 추가 제안은 없었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연설 내용은 어찌 보면 실무 협상을 앞두고 자신의 패를 먼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날 총회장에는 김성 유엔 주재 북한 대사가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직접 메모하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엔 총회 정상 연설문은 어느 나라건 각국 외교 안보 참모들의 집단 지성과 정상의 결단이 담긴 역작(力作)입니다. 현시점에서 그 나라 관심사와 정책 우선순위, 이해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문제를 상황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따라서 시급하지 않은 사안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김 위원장과의 관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연설문 내용에 구구절절 담을 필요가 없었을 거란 해석도 가능해 보입니다. 어떤 관점이든 북한 입장에서는 유엔 총회를 계기로 한 한미 정상회담과 총회 연설이라는 두 번의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속 시원한 답을 못 들은 셈입니다. 오는 30일 김성 대사가 발표할 유엔 총회 연설문을 보면, 북한의 셈법과 그에 따른 대응이 분명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