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정시퇴근? 연차소진? 근데 소는 누가 키우나"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19.09.26 11:01 수정 2019.09.26 21:2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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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꼰대' 13편: "정시퇴근? 연차소진? 근데 소는 누가 키우나"

대전 출장은 과거 1박 2일 코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해주는 KTX 덕분에 대전에 내려가도 당일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잔무를 처리해야 한다. 과거 출장이 주는 시간적 여유나 저녁에 지점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사라졌다. 이동수단은 편리해졌는데, 그 결과가 썩 달갑지만은 않다.

다행히 이번 대전 출장은 3박 4일 일정이다. 현장의 서비스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예상했듯 현장은 인력 부족과 당장의 현안과제 해결에 매몰되어 있어 서비스 향상을 위한 본사 지침대로 행한 것은 거의 없다. 나는 관리팀장과 담당 직원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어쩌려고 이래요? 그래도 점검을 나온다고 했는데 너무 준비를 안 했네요." 실무자가 뭔가 불만을 제기하려는 순간 ("인원도 없는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냐?"라는 말일 거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관리팀장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지적한 것은 빠른 시간 내 보완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해주세요. 나중에 평가 시 대전지사 때문에 점수 나쁘게 나왔다고 하면 안 되니까."

이때 대전지사장이 외근에서 돌아왔다. 나와는 막역한 사이의 선배였다. 방으로 따라 들어갔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언짢으신 것 같은데?"
"오다가 관리부 쪽에서 경고 전화받았다. 별것은 아니고, 오늘 휴가인데 왜 법인카드 썼냐 이거지."

"참나, 무슨 말이에요?"
"세상이 변해서 지금 회사에서 휴가 쓰라고 난리잖아. 그래서 서류상으로만 휴가를 가다가 정말 일이 있어 오늘 휴가를 냈지.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청주 영업점에 문제가 생긴 거야. 어떻게 하냐? 가서 해결해야지. 그래서 거기 가서 한참 일을 보고 난 후 점심시간이 됐길래 영업점 직원들이랑 식사를 같이 했지.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계산을 회사 카드로 긁었고."

"그런데 그게 왜 문제라는 거예요?"
"첫째는 휴가인데 왜 회사에 나와서 일하냐는 거야. 둘째는 휴가 때 회사 카드를 쓰면 안 된다는 거지. 당연히 쉬는 날에 사적 용도로 사용하면 안 되잖아."
"아이고, 너무하네."

"나도 좀 황당하던데 어쨌든 원칙으로만 보면 그게 맞지 뭐, 그런데 직원들 휴가 처리 문제는 머리가 정말 아파. 우리야 보직자들이니까 그냥 포기하고 만다지만 직원들은 다르잖아. 팀원들 모두 그동안 못 갔던 연차 다 소진한다고 하면 없는 인원에 소는 누가 키우냐? "

상황은 답답해도 휴가는 정상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내 말에 선배 지사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초과근로도 문제야."
"여기도 초과근로 엄청나죠? 회사에서는 그것도 없애라고 난리인데…"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초과근로를 없애니? 직원들 퇴근 후에도 카페나 집에 가서 일하는 것 뻔히 알면서 놔두는 거지. 급한 일은 퇴근 스캔 찍은 후 처리도 하고. 정시퇴근은 무슨."
"어디나 똑같군요. 그래도 나중에 문제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곤란해질 거고."
"그러니 문제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당장은 돌려야 하니까 말이야. 하라는 일이 좀 많아야지. 김 팀장 너도 그래서 온 거잖아. 지금 현실에선 할 수 없는 일 하라고 말이야."

뼈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난들 어쩌랴? 이렇게 원칙대로 요구하지 않고 봐주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도 화살이 날라올 테니 말이다.

"우리 때 휴가가 어디 있었어? 난 교통사고 나고도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고… 당장 내일 아침까지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정시퇴근? 말이 돼?… 내가 당신만 할 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저녁에 점검 관련 관계자들 모두 모여 술 한잔할 때 취중진담처럼 지사장이 한 말이다. 아, 이런 말도 했다. "지금 나 동네북이야. 직원들에게는 꼰대 소리 듣고, 경영진에게는 유약하단 소리 듣고..." 지금의 기준과 과거의 당연한 것과의 상충 혹은 원칙과 현실의 괴리에서 빚어진 회사 생활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이 말에, 나는 속으로 공감의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지사장이 화장실 간다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 관리팀장이 나를 같은 편 보듯 하며 말했다. "저렇게 꼰대 같은 말씀을 하시니 우리 팀장들이 미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나는 당황한 티를 안 내고 미소를 띠며 앉아 있는데, 이번에는 담당 실무자 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또 유체이탈이네."

우리 선배 세대도, 내 세대도, 나보다 젊은 세대도 그리고 한참 어린 저 직원 세대도 자기 세대의 기준을 강요하는 상사 때문에 미치겠다고 한다. 아마도 앞으로 들어올 신입 직원은 저 친구를 보면서 또 그런 생각을 하겠지.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거지? 왜 우리는 모두 억울하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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