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벤자민 버튼의 나잇값은 거꾸로 간다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SBS 뉴스

작성 2019.09.13 11:00 수정 2019.09.13 21:3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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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는 값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맞이할 인생의 단계에는 그에 걸맞은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 비용을 제대로 지불한 사람은 건실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인정과 함께 칭찬과 보상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나잇값 못한다'는 질타와 함께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이 '나잇값'에는 단순히 성적이나 수입, 재산 같은 개인적 성취를 넘어서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사회의 기대가 담겨 있다. 우리는 특정 나이에 결혼을 하고, 특정 나이에 아이를 낳고, 특정 나이에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채권자들의 압박을 받는다. 나이의 값은 세월에 따라 원금에 이자를 붙여가며 착실히 올라간다. 정해진 가격을 지불하는 동안에는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이자나 원금이 체납된 순간 독하고 끈질긴 추심이 시작된다.

운 좋은 사람은 평생 나잇값을 체납하는 일 없이 우수 대출고객의 지위를 누리다 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생의 어느 시점엔가 채무 상환 능력을 잃어버린다. 누구는 '백수'가 되고, 누구는 '노총각'이 되고, 누구는 '노산'을 한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중요치 않으며, 당사자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 또한 중요치 않다. 본인이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고 해도 사회가 정해준 가격을 지불하지 못했다는 현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따라서 추심과 독촉을 피할 길은 없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명절은 우울의 근원이요, 동창회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궤도에 실려 사회의 시간표를 착실히 따르던 내 삶이 나이 빚에 쫓기게 된 것은 5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순간부터였다. 나름대로 목표가 분명한 퇴사였고, 생활비와 공부 비용은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둔 저축을 통해 스스로 충당했지만, 소속도 명함도 없는 30대 무직자에겐 애초에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문책성 질문을 면제받을 권리가 없었다.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나잇값 못하는 백수에게도 분명한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로스쿨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처럼 궤도로 돌아가겠다는 성의를 보이는 사람은 당장 원금 상환 능력이 없더라도 이자를 성실 납부하는 중급 대출 고객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미래 계획을 묻는 질문에 "프리랜서로 글을 써보려고…"처럼 뜬구름 잡는 대답을 내뱉는 순간, 상대방 얼굴에서는 정말로 내게 현찰이라도 떼어먹힌 양 그악스런 표정이 떠오른다. 보통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잔소리 폭격이 시작된다. 그러나 내 쪽에서 취할 수 있는 방어 액션은 거의 없다. 비록 상대가 내 인생에 쌀 한 톨 보태준 적 없는 인간일지라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채무자는 내 쪽인 것이다.

그래도 서른 무렵에 첫 추심을 받았던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거액의 나이 빚을 지고 있었으니까.
서메리 인잇_벤자민 버튼의 나잇값은 거꾸로 간다_삽화70대 노인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우환거리로 인생의 첫 발을 디딘다. 사교계의 저명인사인 부모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위협이 될 수치스러운 자식을 어떻게든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성성한 백발을 갈색으로 염색하고, 과장되게 알록달록한 옷을 입히고, 기력 없는 아들의 손에 억지로 딸랑이를 쥐어준다. 천성이 선한 벤자민은 어떻게든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려 애쓴다. 재미없는 공놀이를 좋아하는 척하고, 가끔은 그릇을 엎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아이 다운' 행동을 보여주며 어른들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가 타고난 저주는 단순히 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세월이 보통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유치원에서 쫓겨난 5살에는 굽었던 허리가 조금 펴지고, 대학교 입학식에서 망신을 당한 18살에는 백발 밑에 갈색 머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노년보다 중년의 인상에 가까워진 20대 무렵에는 성숙한 남성을 좋아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그때뿐, 새로 만든 가족들 역시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을 감당하지 못한다. 중년이 된 아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이처럼 꾸미고 다니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춘기 아들 역시 지나치게 어린 외모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 몸에는 활력이 넘치고 마음은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진짜 나이를 공개한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벤자민은 좋아하는 공부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나이를 서른 살쯤 속인다.

그는 청년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유아로 계속 어려진다. 몇 년 후 가족들은 너무 작고 아둔해진 그를 보모의 손에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젖병을 빨고 '코끼리'나 '구름' 같은 단어들을 배우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 날 토실토실 발그레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벤자민 버튼의 인생은 떠들썩하게 시작되고 조용히 끝났다. 언제나 배려가 넘치고 매사에 최선을 다했지만 사는 동안 그는 칭찬보다 비난에 익숙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도 나잇값을 못했다.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대작가가 위트 있게 묘사한 이 촌극을 지켜보며 삶의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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