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의 일상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는 데서 지난날 기억들이 떠올랐다. '벌새'(감독 김보라)는 어떤 의미에서 은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영화는 1994년으로부터 출발한다. 몇 해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1994년은 농구대잔치의 환희와 쾌감을 선사한 복고의 시절로 묘사됐다. 사회와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학가엔 낭만이 넘쳤으며, 가요계에선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아직도 누군가에겐 상처로 남아있는 사건들도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이 성수대교 붕괴다. 강남과 강북을 잇던 다리가 거짓말처럼 무너졌고, 어떤 이의 부모와 딸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다.
영화는 어느 아파트의 902호 문 앞에 선 누군가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엄마! 엄마!! 문 열어줘!"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지만 응답이 없다. 이어 1002호 앞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어 왔어?"라는 한 여성의 무심한 말과 함께 문이 열린다. 그러나 화면 가득 잡힌 은희의 얼굴은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앞뒤 맥락 없이 등장한 오프닝은 호기심을 자극하며 보는 이들을 이야기에 진입시킨다. 한 소녀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한 이야기는 소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로까지 확장된다.
중학교 2학년인 은희(박지후)는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막내딸이다. 강남 8학군의 한 중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날라리'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공부엔 관심이 없다. 동급생인 지완과의 연애가 삶의 유일한 활력소다.
영화는 중반까지 이토록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영화적 긴장감을 형성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야기에 눈과 귀, 가슴을 열어 따라가다 보면 순간순간 웃고, 울게 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랑받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소녀의 하루하루가 쌓여 흥미로운 서사를 형성하고 이 이야기는 시대의 아픔과 만나 대서사시가 된다.
여성의 성장담에서 출발한 영화는 성별을 넘어서고 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성과 공감대를 획득한다. 영화는 성수대교 참사라는 시대의 비극을 소환하지만 성기게 다루지 않는다. 사건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섬세하게 다뤄 인물의 고통과 아픔이 읽히게끔 한다.
"은희의 성장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성장을 다루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한 소녀의 성장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시대의 성장통까지 다룬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94년이지만, 2019년을 살고 있는 누군가가 봐도 낯설지 않는 풍경과 정서들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다.
식사 신은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가족의 불협화음, 세대 간의 불통 구체적으로는 남아선호사상, 학벌주의, 물질 만능주의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도 보여준다. 압축적이면서 인상적인 시퀀스다.
'벌새'는 가지가 많아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를 훌륭한 각본으로 아울렀다. 좋은 각본이란 결국 등장인물 모두에게 각자의 서사를 부여하고, 자신의 에피소드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인 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에게는 이런 순간이 하나씩 등장한다. 카메라는 정밀한 현미경이 돼 이런 순간들을 포착한다.
좁은 시야의 상업논리로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몇몇 책임자들은 "돈이 되지 않을 영화"라고 손사래를 쳤을지 모르겠지만 구조와 형식의 무제약이 이토록 문학적인 영화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초행' 등의 작품을 통해 '독립영화계의 전도연'으로 불렀던 김새벽의 신비로우면서도 자유로운 매력도 영지라는 캐릭터와 만나 극대화됐다.
영화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은 '벌새'에 대해 "은희가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라고 요약했다. 감독은 은희의 어떤 얼굴로 시작해 또 다른 얼굴로 영화의 막을 내리면서도 제3의 챕터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뒀다.
벌새는 무게가 30g에 불과한 작은 새지만 1초에 90번의 날갯짓을 한다. 가족과 남자친구, 동성친구에게 사랑받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은희의 모습과 닮았다.
이 아름답고 재밌는 영화를 추천한다. 이야기와 캐릭터가 실어 나르는 형형색색의 감정들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놀라운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벌새'가 만들어낸 현미경의 마법이다.
(SBS funE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