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책으로 인생의 '여행'을 배웠다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SBS 뉴스

작성 2019.08.10 11:02 수정 2019.08.10 17:3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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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시즌이 되면서 늘 막히던 출근길에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일상은 남아있는 자들에게도 한결 여백을 더해준다. 이맘때의 연례행사로 더위와 지친 일상을 피해 산과 바다를 누비는 사람도 있고, 낯선 나라의 휴양지를 거닐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또 어떤 이들은 단순한 연례행사를 넘어 자기 인생의 '긴 여행'을 결단하고 어렵사리 한 걸음을 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직과 퇴사같이 익숙한 업의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생활의 뿌리가 깊숙이 내린 곳을 옮겨 광대무변한 더 큰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삶의 리듬과 방식을 리셋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상처와 망설임을 뒤로하고 다음 단계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떠남과 머무름, 우리 인생의 순간들을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하며 완성해 가는 중요한 선택들이다. 그 선택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무늬는 나조차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 다만 삶의 목소리를 따라 떠나고 머무를 뿐이다.

불확실하기에 때론 혼자 힘으론 힘들고 옆에서 거드는 존재가 있게 마련. 내 안의 희미한 목소리를 증폭시켜 선명하게 들리게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만드는 기폭제. 책은 때로 우리를 부추기고 뒤흔들면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폭제가 되어준다.

몇 번의 이직과 전직이 당연시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나는 농담처럼 스스로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도 좋을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첫 직장을 20년 넘게 다니고 있는 유난한 '장기근속자'이니 말이다. 그만큼 기존의 것에 대한 관성이 큰 나도 '인생의 여행'을 감행한 적이 있다.

겨우 서른을 넘긴 그때, 거친 세상에 적응하는 일을 지상과제로 여기고 20대를 고스란히 바치고 난 뒤 몸도 마음도 고갈된 상태였다. 풋풋한 젊음과 가능성의 열기가 남아 있는데, 쳇바퀴 도는 직장인의 삶 이외에 다른 길은 없는 걸까, 늘 꿈꾸던 세계 여행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일까. 낮에는 몰려드는 일에 진을 빼고 밤에는 뾰족한 답도 없는 고민에 진을 빼는 시간이 반복됐다.

그 무렵, 외근 다녀오는 길에 들른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이 내 눈과 영혼을 사로잡았다. 김남희 작가의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이국적인 황토색 길이 구불구불 펼쳐지는 표지 사진이 마음을 흔들었다. 지금이야 떠나는 자들의 클리셰가 되다시피 했지만, 당시만 해도 산티아고 가는 길은 굉장히 낯선 곳이었다. 책을 사온 뒤 밤을 새가며 다 읽었다.

'순례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곳엔, 오직 걷기 위한 이들이 전 세계에서 모여든다고 했다. 순례의 목적은 다양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800km를 걷는 내내 온전히 나와 대면한다는 점이었다.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걸었던 길, 그들의 인생 전후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길, 그래 여기를 가야겠다. 그리고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나는 한참을 걷고 돌아왔고, 결론부터 말하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내 안의 소리를 따라본 최초의 경험과 특별한 시간들은 힘이 들 때면 찾아 쓰는 기억의 저장고가 되어주었다.

'단절'을 위한 여행을 떠났지만, 그것으로 우리 삶의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길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시시때때로 길을 잃고 매너리즘에 빠질 때, 미해결된 질문이 내 안에 떠오를 때 '성장'을 위한 여행을 선택해야 한다. 이는 단지 공간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더 깊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일이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나라는 세계를 여행할 땐 좀 더 섬세하고 꾸준한 탐색과 주의가 필요하다. 오랜 여정이기에 사이사이 지치지 않게 영감과 응원을 공급받아야 한다. 복귀하여 시간이 쌓이고 일의 관성에 떠밀려 갈 때쯤, <신화의 힘>, <인생수업> 같은 책들은 다시 내 안에서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이란 이 말의 뜻을 해석하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짧은 휴가에서 삶을 바꾸는 여행, 그리고 내적인 여정까지 우리는 늘 자신의 길 위에 있다. 사실 책이 여행을 부추긴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 안의 불꽃을 탁 하고 점화해줄 믿을만한 동기가 필요했던 것인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책은 인생여행자의 가장 확실한 길동무다. 묻고 싶다. 지금 당신이 떠나는 여행의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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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