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쓸모가 좀 없으면 어때요

김지미 | 영화평론가

SBS 뉴스

작성 2019.08.01 11:02 수정 2019.08.02 08:0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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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훈화 말씀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어른들 말씀을 딱히 귀담아듣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반복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너무 오래, 너무 자주, 너무 많은 어른들로부터 들은 탓인지 이 명제는 내 무의식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어떤 일을 할 때든 속으로 그 일이 무엇에 쓸모가 있는지 따져 묻는 버릇이 생겼다.

쓸모라는 건 인간을 현대 사회의 부품처럼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이 명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늘 나의 '좋아함'은 '쓸모'와 분리되지 못했다.

지난 2년간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며 살게 됐다. 늘 꿈꾸던 삶이었다. 당연히 행복해질 줄 알았다.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점차 내가 쓸모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용하지 않음을 끈질기게 설득해야 했다. 진이 빠졌다. 그러다 <토이스토리 4>를 보았고 버둥대는 주인공 '우디'에게서 나를 보았다.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들의 모험과 우정을 그린 영화 시리즈 <토이스토리>는 24년에 달하는 제작 기간만큼 매 편마다 주인공들도 성장한다. 새로운 장난감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꼈던 1편의 우디는 에피소드가 거듭될 때마다 더 멋진 리더가 되어갔다. 1편부터 3편까지 우디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주축이자 믿음직한 대장이었다. 하지만 4편의 우디는 시대에 뒤처진 리더십과 책임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어른들의 충고 같은 캐릭터였다.

4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편에서 다소곳한 아가씨였던 '보핍'의 멋진 귀환이다. 아름다운 양치기 소녀 인형인 보핍은 주인을 잃고 놀이터 생활을 하면서 터프하고 독립적인 리더로 거듭났다. 리더로서 보핍의 훌륭한 자질은 모두를 어떻게 다르게 다뤄야 할지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에 사로잡혀 무조건 직진하려는 우디와 달리 더 많은 것을 지키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안다.

우디에게 장난감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다. 우디의 첫 번째 주인이었던 앤디가 그랬던 것처럼, 새 주인인 보니가 장난감들의 쓸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우디는 희생이 따르더라도 보니에게 꼭 필요한 '포키'를 구하려 한다. 포키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보니가 손수 만든 장난감이다. 우디는 자기가 쓰레기인 줄 알고 자꾸만 쓰레기통으로 돌진하는 포키가 장난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체성을 부여한다.

포키를 구하기 위해 무조건 적진으로 돌진하려는 우디에게, 그를 돕던 친구들이 묻는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중요하지 않아?" 우디의 행동에 있어 우선순위는 주인인 인간의 욕구를 기준으로 정해진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들이 타인의 욕망을 기준으로 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가 우디와 보핍의 세계가 분리되는 지점이다.

보핍에게는 덜 중요한 존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적과의 싸움에서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을 택한다. 1편의 보핍은 우디와 같은 세계관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주인 없는 생활을 통해 보핍은 다른 삶을 알게 되었다. 목적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삶. 이번에는 보핍이 우디를 자신이 발견한 세계로 이끈다.

인간에 의해 자신의 가치가 규정되는 것을 거부한 보핍의 세계관과 걸크러시 액션은 너무 매력적이다. '쓸모 있는 삶'의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내게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작품은 꼭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디의 고지식한 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짚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에서 우디와 친구들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하지만, 영화는 이 가운데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른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위안이 있다. 인생에 진짜 악역은 없다는 것.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으려 우디의 사운드박스를 탈취한 악역 '개비개비'마저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어떻게 보면 개비개비도 우디와 다르지 않다. 다만 주인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을 뿐.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만큼 충족되지 못했을 때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도 없다.

이것이 4편과 이전 시리즈의 가장 큰 차이다. 전편들의 서사가 늘 특정한 악역을 설정해두고 갈등을 만든 뒤 우디를 중심으로 정의를 회복하던 것과 달리 악역마저도 슬픔을 잘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었더니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누구나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고, 같은 사람도 인생의 시기에 따라 가치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디와 그 친구들이 보여준다. 쓸모 있으려는 노력 혹은 쓸모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안간힘, 둘은 어쩌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무엇이 되려 하지 말자. 이효리 말대로 "그냥 아무 사람이나 되자."

※ 사진=영화 '토이스토리 4'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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