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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제2, 제3의 안인득은 막아 보자"…한국형 '문제 해결 법원' 첫 시도

처벌 아닌 치료에 중점, 한국형 '치료사법' 모델의 등장

지난달 19일, 살인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 모 씨의 항소심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씨는 자신의 아내를 흉기로 살해했지만, 이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치매 증상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재판부는 "가족들이 피고인을 장기 입원 치료할 병원을 구해 알려준다면 입원 치료를 받는 것을 조건으로 직권 보석을 허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는 피고인을 무죄나 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도 아닌데 법원이 나서서 풀어준다는 겁니다.
판사
● 치료사법(Therapeutic Jurisprudence)이란?

이런 일이 흔한 일인지, 혹은 가끔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를 제게 묻는다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서울고등법원 관계자도 "이런 사례를 듣거나 경험한 적이 없다"며 "처음 있는 일이 맞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왜 재판부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이를 헤아리기 위해선 '치료사법'이라는 우리에겐 생소한, 하지만 선진국에선 이미 많은 논의와 실천이 이뤄지고 있는 사법적 담론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치료사법은 알코올 문제, 마약 문제, 또는 각종 정신적 문제 등으로 범죄가 반복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적절한 치료 없이 기계적으로 범행을 처벌하는 기존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처벌 기간이 끝나면 당사자는 석방될 테지만, 전부터 겪었던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 정신적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수감 기간 중 악화돼 나중에는 더 큰 범죄를 저질러 결과적으로 법원의 부담으로 가중될 수 있다는 겁니다.

● '무력감'을 호소하는 판사들

이와 같은 문제 상황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납니다. 지난 2010년 경상남도 진주시에 살던 안 모 씨는 차를 타고 가다가 자신을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상대방과 말싸움을 했고, 이 과정에서 화를 참지 못해 흉기를 들고 상대방을 위협했고, 심지어는 흉기를 휘둘러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당시 안 씨는 편집형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법원은 안 씨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법원은 안 씨가 정신적 문제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으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치료'가 아니라 이런 사실을 감안해 형을 감경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형법 제10조 제2항) 그리고, 9년 뒤 안 씨는 또다시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방화 살인사건을 저질러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을 다치게 했습니다.
진주 방화 살인, 안인득
'진주 방화 살인사건' 안인득의 경우 근본적인 해결책은 치료사법이였다는 점을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경우 법원은 기존 사법체계에 대한 한계와 대안적 사법체계의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치료사법에 대한 실천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미국의 연구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전통 사법체계에서 판사들이 느꼈던 '무력감'입니다.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자가 시간이 지나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다시 법정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법원은 스스로 '회전문' 역할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형사법정에서 이뤄진 결정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에 무력감을 가질 수밖에 없던 것이죠.

● 치료사법의 실천 : '문제해결법원'

미국의 사법체계는 이러한 문제의식 끝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까? 그것은 바로 '문제해결법원(Problem Solving Courts)'입니다.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정하는 기존의 형사사법체계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보자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의 문제해결법원은 약물 중독환자들을 치료하는 '약물법원'에서 시작돼 피고인을 구금하는 대신 치료를 제공하는 '정신건강법원', 공동체 사회의 범죄와 무지설서를 소탕해 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지역사회법원', 전통적으로 사법체계의 개입에서 벗어나 있었던 가족 내에서의 폭력 문제를 다루는 '가정폭력법원' 등으로 발전했습니다.
의료 판결 법정 (사진=유토이미지)
2012년을 기준으로, 약물법원은 1300여 개로 미국 전역의 문제해결법원 가운데 44%를 차지합니다. 그다음으로 많은 것은 정신건강법원입니다. 1997년 플로리다에서 정신질환이 있는 형사 피의자가 구치소 등에서 자살하는 사례를 예방하기 위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래 15년 만에 미국 전역에서 330여 개로 늘어났고, 전체 문제해결법원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11%에 이릅니다. 정신건강법원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해 교도소에 수용해 보았자 교도소 당국이 적절한 치료를 감당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출소 후에는 재범을 저질러 법의 심판을 다시금 받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치료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피고인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정신건강법원이 가장 먼저 도입된 플로리다 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정신건강법원이 처리하는 사건은 성폭력 사건을 제외한 경범죄나 음주운전을 제외한 교통사범입니다. 안인득의 사례처럼 정신적 문제를 가진 이들이 처음엔 비교적 가벼운 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서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법원이 개입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사건들 가운데 피고인이 우울증, 정신분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이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 피해자 등의 동의를 받아 판사, 검찰, 피고인의 변호인 등의 신청이나 의뢰를 통해 정신건강법원으로 사건이 배당됩니다. 정신건강법원으로 가는 사건들은 대부분 단순 폭력, 주거침입, 절도 사건 등이고, 대상자의 정신적 장애는 정신분열증, 양극성 장애 순으로 통계상 확인되는데 매달 15건의 사건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미국 법원 /  판결 (사진=유토이미지)
● 문제해결법원은 정말 '문제'를 해결했을까?

그렇다면, 치료사법은 어떤 성과를 보였을까? 우선 정신건강법원에서 근무하는 판사들은 전보다 확실히 무력감을 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02년에 발간된 미국의 한 논문(Judges and Problem-Solving Courts)은 브루클린의 판사 John Leventhal가 "많은 판사와 법률가들은 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인간성 증진과 관련 있는 사건을 맡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문제해결법원(가정폭력법원)에서는 매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라고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판사들의 무력감만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미국 뉴욕주 브루클린의 정신건강법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정신건강법원의 치료 과정을 졸업한 정신질환자가 다시 체포될 가능성은 60% 정도로 치료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교 그룹보다 8% 낮게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치료 과정을 졸업한 정신질환자들이 다시 범행을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40%를 기록했는데 비교 그룹보다 17% 낮게 나타났습니다. 마약법원의 경우엔 미국 NIJ(National Institute of Justice)가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마약법원 프로그램을 졸업한 1만 7천여 명 가운데 2년 이내에 재범할 확률은 27.5%에 그쳤는데, 대조군과 비교하면 20% 넘게 낮은 수치입니다. 재범률을 낮추는 것에도 성과가 있던 겁니다.
법원
● '치료 구금'으로 첫 발을 뗀 우리 치료사법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항소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직권으로 보석을 허가하겠다고 밝혔을까. 그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치료사법에 근거해 재판부가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씨의 유무죄를 엄정하게 가리고, 형량을 실수 없이 계산해 형을 선고하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본 겁니다. 물론 우리에겐 치료사법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문제해결법원은 전무하기에 재판부는 치료를 전제로 한 보석을 이야기하며 '치료 구금'이란 새로운 방식을 직접 제안했습니다.

치료사법이 물론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 치료사법을 실천한 미국에서도 문제해결법원이 여전히 사법체계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는 냉정한 평가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판사가 문제 해결 업무를 담당한다는 점 자체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실제로 Denver District Court의 Morris B. Hoffman 판사는 "판사가 사회사업가나 정신의학자는 아니다. 우리는 형법을 집행하는데, 그것은 형법이 그 자체로 사회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형법은 다른 사회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의 논문에서 직접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치료 구금'이란 방식으로 첫 발을 뗀 우리 치료사법의 미래를 비관하기보다는 낙관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 형사사법체계는 범죄 행위의 가벌성만을 고집스럽게 고민하도록 만들었지만, 치료사법은 형사사법체계에 머물고 있는 판사는 물론 검찰과 변호인 모두가 범죄 행위를 넘어 피고인이란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또 그 너머에서 피고인이 한 사회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취재파일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참고자료들
- Census of Problem-Solving Courts(2012, U.S. Department of Justice)
- 외국사법제도 연구(2013, 법원행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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