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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냥 하라는 대로 해"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인-잇] "그냥 하라는 대로 해"
'결국 꼰대' 9편: "그냥 하라는 대로 해"

기업은 많이 팔기를 원한다. 많이 팔려면? 당연히 상품이 좋고 판매 전후의 서비스가 양호해야 한다. 그런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대외기관 평가나 수상 경력을 확인하는 거다. 그래서 회사는 그 결과에 목을 맨다.

사업부문장이 임원회의 때 갑자기 나를 불러 VOC 발생률을 물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국가 기관에서 우리 업종의 회사들을 상대로 별도 서비스 평가를 하고 그 결과를 금년 말부터 순위별로 고시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기획팀이 분석해보니 서비스 개선을 위한 전사적 노력과 그 결과가 상당히 중요하게 배점이 매겨져 있고, 서비스 개선 부문의 항목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우리 팀의 업무인 VOC 실적 및 개선율이라는 것이다.

사업부문장은 말했다.

"어떻게 하든 1등을 해야 해. 만약에 우리 사업부 실적 때문에 망신 당하는 순위가 나오면 매우 곤란해진다고. 김 팀장, 내가 알고 있기로 올해 VOC 실적이 전년대비 많이 개선되었어. 평가항목에도 있고 하니 특별히 별도 관리해서 반드시 만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직을걸고 하라고."

알겠다고 하고 얼른 나왔으나 머릿속에는 '잘못 산출된 VOC 개선율은 어떡하지?', '왜곡된 것을 알면서도 그냥 가야 하나?', '이대로 포기하면 담당 임원과 전 팀장이 나를 비웃겠지?'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휙휙 지나갔다.

창피한 마음에 처음 생각대로 밀고 나갈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왜곡된 통계를 바로잡으려고 굳이 회사 평가점수까지 깎아먹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자 잘못 산출되었다고 확신한 개선율이 아주 근거 없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숫자가 맞을 수 있다. 어, 정말 그러네. 통계란 정말 마법 같다.

그래도 착잡했다. 특히나 곽 대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일단은 내 위신이 깎이게 생겼다. 담당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해 수정을 시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냥 놔두자고 해야 하니 말이다.

남은 하나의 이유는 좀 더 미묘했다. 곽 대리에게 회사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왜곡된 자료를 그냥 놔둬야겠다고 말하면, 그는 겉으로는 당연히 이 상황을 이해하고 지시에 따르겠지만 속으로는 '역시 세상 참 거시기 하네, 밥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뭐'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구로 인해? 바로 나로 인해 말이다.

싫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이 내용을 곽 대리에게 전달할까 고민했다. 윗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며 위로 비난을 돌릴까 아니면 지금 상황을 자세히 얘기하고 설득해 그냥 '고'하자고 얘기할까 저울질하다가 그냥 이런저런 설명 없이 "그냥 해!"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하면 어쨌든 그가 욕하는 대상은 회사나 세상이 아니라 나 개인이 되니까.

약간 씁쓸해졌다. 내가 굳이 원망과 비난을 뒤집어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내가 신입 직원일 당시 회사 정책에 의구심이 생겨 선배들에게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야,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너무 많이 알면 회사 다니기 싫어져." 들으면 병이요 안 들으면 약이라는 그들의 말이 나를 지금까지 회사 다니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곽 대리에게 배려(?)를 베풀 차례다.

누군가 어쩌다 이 글을 읽는다면 내가 무슨 대단한 애사심을 가진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위해서다.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담당 임원과 신경전을 벌이기가 너무 싫었다. 잘못하면 괘씸죄에 걸려서 또 쫓겨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심 믿었던 사업부문장이 내 편이 될 리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 전투의지는 급격히 사라졌다. "야, 더 이상 가면 너 위험해"라고 뱀의 뇌가 나에게 '스톱'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그러자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싫어졌다. 회사가,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래서 얼른 나는 이런저런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대며 나의 결심을 스스로에게 합리화 했고 결국 곽 대리에게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닥치고 회사에 이득이 되도록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 상황적 분위기, 조직 문화에 압도되어 자신의 행위가 맞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결국은 영혼(주체적 판단) 없이 행동하기로 선택하는 것. 처음엔 생각이 복잡하더라고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되면 결국엔 혼란과 죄의식도 사라진다.

이 사건은 내가 팀원에게 일을 시키는 방식을 변하게 했다. 처음 얼떨결에 팀장이 되었을 때 '일을 강제로 시키면 안 돼, 번거롭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서 담당자가 자발적으로 하게끔 해야지' 생각했지만, 이 사건을 겪고 나서는 꼭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을 다 설명해 주고 이해를 구하면서 일을 시킬 수는 없다. 팀원들의 수동적, 방어적, 이기적 업무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들에게도 모르는 게 약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굴곡 없는 조직생활을 원하는 나를 위해, 언제나 목표달성을 최우선시하는 조직을 위해, 직원들의 공감과 이해보다는 지시에 대한 복종이 필요할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후 나는 꼰대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아휴, 그냥 하라는 대로 해."를 수시로 꺼내드는 팀장이 되고 말았다.

-다음 편에 계속-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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