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韓 공군 비난하는 러시아…靑 '섣부른 브리핑' 망신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작성 2019.07.25 09:31 수정 2019.07.25 17:2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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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韓 공군 비난하는 러시아…靑 섣부른 브리핑 망신
어제(24일) 오전 11시 반쯤, 인터넷 포털과 TV 뉴스에 이해하기 힘든 뉴스 속보들이 쏟아졌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깊은 유감을 표명했고, 즉각 조사에 착수한다", "침범 의도는 없었고, 기기 오작동으로 계획되지 않은 지역으로 진입한 것 같다". 청와대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의 언론 브리핑이 기사화된 겁니다.

새벽부터 외신들을 통해 전해진 "객관적 자료에 따르면 외국 영공 침범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러시아 국방부 공보실의 언론보도문과는 정반대의 톤(Tone)이었습니다. 또 러시아 장거리 항공대 사령관 세르게이 코빌랴슈 중장이 "한국 전투기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핏대를 세우며 러시아 언론보도문과 똑같은 주장을 펼치는 러시아 공군의 영상도 벌써 공개된 터라 윤 수석 발언의 진위(眞僞)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인데 윤도한 수석이 전하는 러시아 정부의 표정은 온화하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노릇이었습니다. 역시나 윤 수석이 인용한 건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제(23일) 국방부로 초치됐던 주한 러시아 차석 무관의 말이었습니다. 우리 국방부가 항의하러 부른 일개 대령의 말을, 윤 수석은 러시아 정부의 공식 의사인 양 발표했습니다. 

국방부도 걱정입니다. 정무적 판단력이 실종됐습니다. 어제 아침 일찍, 7시도 되기 전에 러시아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 담긴 전문이 국방부에 도착했습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보면 당연히 국방장관, 청와대로 보고가 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했습니다. 국방부의 판단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 공식 입장이 나왔는데도 초치된 무관의 말만 인용한 윤도한 수석● 공식 입장에 귀 닫고 러 대령 말만 전하는 靑

그제 오전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 A-50이 독도 영공을 두 차례 침범하자 국방부는 오후 3시 주한 러시아 차석 무관을 초치했습니다. 불러서 혼내고 우리 정부의 뜻을 밝히는 자리였습니다. 초치된 러시아 무관의 임무는 하고픈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정부의 의사를 잘 듣고 파악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러시아 입장 듣자고 부른 게 아니라 우리 입장을 러시아에 전하기 위해 러시아 무관을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불렀으니 하는 말에 귀 닫을 수는 없는 일. 러시아 차석 무관은 그곳에서 이런저런 말들을 했습니다. 국방부 복수의 관계자들은 "초치된 러시아 무관의 발언은 개인적 견해"라고 단단히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하루 전에 러시아 무관이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것처럼 발표했습니다. 별 책임도 없는 외국 대령의 말 몇 마디일 뿐인데, 그래서 국방부의 현역 장교들도 개인적 소견으로 치부했는데, 일국의 차관급에 있는 사람 혼자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러시아 무관 초치 몇 시간 뒤에는 러시아 국방부의 공보실 명의 언론보도문, 러시아 공군의 사령관 발언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공식 입장입니다. 독도 영공 침범 안 했고, 오히려 우리 공군 전투기들이 공중 난동을 부렸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런데도 윤 수석은 공식 입장 대신 대령의 말만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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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는 당초 어제 오후 1시 45분, 러시아와 일본을 함께 비판하는 입장문 발표를 준비하다가 윤 수석의 브리핑 이후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러시아가 유감을 표명했고 자발적으로 조사까지 한다고 윤 수석이 두둔하니 국방부 혼자 러시아를 탓하기가 머쓱해진 겁니다. 국방부는 부랴부랴 입장문에서 러시아 대목은 빼고 발표했습니다.

힘만 믿고 법 따위는 아랑곳 않는 불곰에 맞서, 국방부가 나라 권리 주장하려고 뛰어다니다 윤 수석의 가벼운 입에 걸려 넘어진 꼴입니다. 청와대의 입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입입니다. 가벼이 놀려서는 안 됩니다.
러시아 공군 장성이 독도 영공 침범을 부정하는 러시아 정부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판단력 실종된 국방부

현지 시간 23일 오후, 주러시아 한국 국방무관은 러시아 국방부로부터 "러시아 정부의 입장이 담긴 문건을 접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우리 무관과 말도 섞지 않고 건조하게 서류만 전달했습니다.

러시아 정부 입장이 담긴 전문은 어제 오전 7시 이전에 국방부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전문은 해당 국실 밖으로는 나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러시아의 전문이 왔다는 사실을 이른 오후에야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청와대는커녕 국방장관에게도 즉시 보고가 안 됐다는 뜻입니다. 윤도한 수석도 전문의 존재를 모르고 러시아 무관의 말이 전부인 것처럼 언론 브리핑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윤도한 수석의 잘못이 가벼워지지는 않습니다.

일부 기자가 러시아 공식 입장 전문에 대한 취재를 안 했으면 아주 오랫동안 러시아 정부의 전문은 빛을 못 봤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들이 취재하니까 국방부는 마지못해 러시아 정부의 전문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청와대에 알렸습니다.

전문을 제때에 보고하지 않은 데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이 이미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같은 내용인 전문을 일찍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어제 새벽부터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건 사실이지만 다른 데도 아닌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실은 몰랐습니다.

외국 군용기의 영공 침범은 6·25 종전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전투기가 아니라 경보기가 넘어왔으니 상대적으로 무겁지 않은 일"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번 일은 주권을 침해당한 중대한 사건입니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이 도착했으면 당연히 군 수뇌부와 청와대에 즉각 보고됐어야 했습니다. 이런 서류를 깔고 앉았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목선 사건, 해군 2함대 사건에서도 군은 이성적 판단을 못 하고 스스로 흔들렸습니다. 러시아 군용기를 경고사격하면서 잘 쫓아내더니 엉뚱한 데서 또 판단 미스입니다. 한두 번은 실수로 쳐서 봐주기도 하지만 세 번 연속이면 곤란합니다. 삼진 아웃돼도 할 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