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빌더버그 그룹, 그리고 네트워킹의 가치

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 모인 각계 인사들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19.07.18 15:1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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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0일 세계의 이목이 스위스 레만호(湖) 북동쪽 작은 도시 몽트뢰에 쏠렸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한 이 도시에 미국·유럽의 정·재계 실력자와 석학, 유력 언론 관계자 등 13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든 겁니다. 미국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사티아 나델라 MS CEO 등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거물들을 한 자리로 부른 모임의 이름은 '빌더버그 그룹(Bilderberg Group)'입니다.

올해로 67번째를 맞은 빌더버그 그룹은 유럽과 미국 사이 대화와 이해를 목표로 1954년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가 만들었습니다. 처음 회의를 연 호텔 이름에서 모임 명칭을 따 매년 5~6월 유럽과 미국 등지 호텔이나 고성에서 만납니다. 자유롭게 토론하되,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외부에 공개 않는 이른바 '채텀하우스 룰'이 특징입니다.

빌더버그 회의에 참석한 세계 실력자들은 그동안 자본주의의 미래 같은 거창한 주제를 논의해온 걸로 알려졌습니다. 회의록이 공개되지 않다 보니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이 세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겁니다. 인터넷엔 1991년 이 모임 명예 회원으로 추대된 빌 클린턴 당시 아칸소 주지사가 이듬해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둥 믿거나말거나식 얘기도 넘쳐납니다.
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사진=연합뉴스)빌더버그만큼 비밀스럽진 않지만, 한국에도 정재계 실력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습니다. 1974년 시작해 올해 44회째를 맞은 대한상공회의소 '제주 포럼'이 그것입니다. '전경련 CEO 포럼'과 함께 경제계 하계포럼을 대표합니다. 본래 '최고경영자대학'이란 이름으로 회원사 경영자들에게 경영이론과 회계 등을 가르쳤던 것이 2008년 명칭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대 250만 원을 내고 참가한 기업인 600명이 제주 특급호텔에 모여 만찬과 골프를 즐기거나 주변 관광지를 돌며 친목을 다집니다. 작년 유시민 작가가 '2·3세 기업인보다 김정은이 낫다'고 말해 설화를 남긴 무대도 바로 이 포럼입니다.

17일 개막해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 중인 올해 포럼 주제는 '통찰과 힐링'입니다. 포럼 홈페이지는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소개하지만 논하는 주제는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포럼 첫날인 어제부터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한국경제, 새로운 성장의 길'을 주제로 기조연설 격 강연을 했습니다. 더구나 올해는 일본 경제보복, 미·중 무역 분쟁, 주 52시간 노동 본격화와 최저임금 등 경제계 현안이 산적한 때라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연합뉴스)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연합뉴스)숨 돌릴 틈 없는 경쟁이 일상화한 기업인들로선 이런 포럼을 통해 평소 접하지 못했던 연사들의 통찰 담긴 강연을 들으며 미래를 대비하기도 합니다. 올해는 세계화 4.0을 주창한 리처드 볼드윈 교수와, SK 최태원 회장 등이 이 자리를 찾아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족끼리 포럼에 참가한 한 식품업체 대표는 "최신 IT기술에 대해 잘 몰랐는데, 루이 14세 목소리까지 데이터로 재현해 냈다는 구글 매니저의 강연이 인상적이었다"며, "서로 잘 몰랐던 업계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재미가 있다"며 만족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융합이 화두인 오늘날 세계에서 분야별 장벽은 도태의 지름길입니다. 정치와 경제 역시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의 의사결정이 때로 경제인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기는지는 지금 한일갈등 여파를 보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서로 만나고, 얘기하고 고민을 나누는 '네트워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치동맹이라고도 불리는 미국과 유럽이 오랜 시간 안정적인 동행을 해 온 데는 빌더버그 같은 모임의 역할도 있었을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상의 제주포럼 같은 자리가 더 늘어나고 각계각층 인사들이 섞이며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길 기대합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