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비서실 출신들이 왜 성공하는 줄 알아?"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19.07.10 11:00 수정 2019.07.12 16:3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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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꼰대' 8편: "비서실 출신들이 왜 성공하는 줄 알아?"

"팀장님. 다시 원래대로 하라고요? VOC 통계 수정하는 것이 맞다고 하셨잖아요."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나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곽 대리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만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곽 대리 저 녀석도 얼마 전 나처럼 엄청 성이 났겠지. 그냥 내가 욕을 먹자. 곽 대리는 모르는 게 약이야. '

이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며칠 전 내가 곽 대리에게 물었다.

"통계가 왜곡된 것은 맞죠? 그런데 왜 이것을 수정하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는 거죠?"

"이거 이전 팀장께서 지시하신 방법으로 산출해낸 것입니다. 방법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무슨 숫자를 넣느냐가 중요하죠. 어쨌든 이후 고객 불만율은 점차적으로 떨어졌고 지금은 전에 비해 현격히 개선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업부문장이 만족해하였고 그것을 사장님에게도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칫 큰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문제?"

"갑자기 실적이 확 나빠지면 여러 명이 곤란해질 것 같은데요?"

"여러 명? 그래도 고칠 것은 고쳐야지. 계속 이러면 좋지 않아요. 회사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면 큰 문제가 발생된다고. 고객이 느끼는 서비스는 개판인데 잘못된 숫자에 현혹돼서 회사는 잘못된 상황을 그냥 방치할 거 아니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곽 대리에게 데이터 오류를 수정해서 VOC 불만율을 재산출하고 본문 내용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곽 대리는 머리를 긁적긁적했지만 통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난 이전 팀장에게 전화했다. 경영층이 정례적으로 보고받았던 회사 서비스율에 통계 오류가 있었음을 알게 되면, 곽 대리 말대로 전 팀장이 곤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 상으로 사정을 얘기하며 양해를 구하자 의외로 "알았다. 알았는데 잘 판단해서 해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하지만 이 잘못은 지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확신으로 나는 자료를 추가 보완한 후 다음 날 담당 임원을 찾아갔다. 이 보고서가 전자 결재로 담당 임원에게 도달하기 전 미리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서류를 보자 담당 임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저번 달은 고객 불만이 늘었죠?"

"예. 그게 지금까지 통계가 잘못 산출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나는 대략 설명을 드렸다. 하지만 담당 임원은 그것에는 별 반응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왜 저번 달은 고객 불만이 늘었냐고? 지금 사업부문장께서 고객 불만율 관련 엄청 민감한 거 알지요. 사장님도 이거 제로화하라고 강조하셨던 거예요. 최근 좀 줄어서 조용하게 넘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늘면 어떻게 해. 어떻게 할 거예요?"

담당 임원의 눈빛과 어조가 상당히 차가웠다. 당황스러웠다. 다시 설명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나와 다시 보고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마침 오후에 담당 임원 주재 회의가 열렸다.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보고는커녕 그 회의에서 나는 무지하게 '쫑크'를 먹었다.

그는 내가 보고하는 것 하나하나에 합리적 지적이긴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나를 비난했다. 같이 참석한 팀장들도 회의 종료 후에 뭐 실수했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하여튼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진행되었고 마지막 팀장이 보고를 끝내자 그는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비서실 출신들이 왜 어디서나 더 큰 성공을 하는 줄 알아?"
참석한 팀장들은 당연히 묵묵부답이었다.

"조직장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아서 그런 거야. 그들은 겉으로 말하지 않는 VIP의 의중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서 거기에 맞게 사전에 조치를 취하지. 내가 매번 말하지만 여기 있는 분들도 더 성장하려면 이 능력을 길러야 해. 이만 끝냅시다."

짜증이 올라왔다. '뭐야 이거, 날 협박하는 거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누가 알랴. 이 지적이 나를 향한 것인지 모두를 향해 말한 것인지. 나도 그냥 나한테 얘기한 것이라고 느낄 뿐 이것이 아까 그 일에 대해 '알아서 해'라고 우회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이라고는 증명할 수 없다.

'역시 임원들은 고단수군' 뇌까렸지만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누구한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전자결재 의견란에 두리뭉실하게 실적이 하향된 사유를 기재하고 그 문서를 승인했다.

몇 시간 뒤 담당 임원이 나를 불렀다. 그는 "고객 불만이 왜 늘었어?"라는 질문을 이번에는 하지 않고, 보고서 내용 중 다른 항목의 분석 자료에 대한 지적을 엄청나게 해댔다. 그러면서 그는 지적한 것에 대한 내용 보완과 실질적인 대책을 수립해서 다시 보고하라고 지시한 후 그 문서를 보류했다.

이후 나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재보고를 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매번 트집을 잡혀 혼나기만 했다.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다. 하지만 내 주장을 꺾기는 싫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은 애사심 혹은 정의감만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사업부문장이었다.

사업부문장이 서비스율 통계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 성향상 분명히 내 편을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담당 임원은 코너에 몰리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엔 이것은 전 팀장의 생각이 아니라 담당 임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 '곧 진실은 밝혀진다. 두고 보자.'

그러던 어느 날 담당 임원한테 전화가 왔다. 사업부문장 주관으로 임원 회의를 하고 있는데 당신을 찾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다. 황급히 회의실로 갔다. 내가 들어가자 사업부문장은 대뜸 "최근 VOC 발생률은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그곳에 있는 담당 임원의 눈치를 보느라 얼른 답변을 못하는 사이 사업부문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발언은 나를 절망케 했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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