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들어가 5년을 버틴 첫 정규직 직장이었다. 나는 2~3개월 새 그 팀에서 퇴사를 택한 네 번째 직원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보고자 간절히 호소했던 마지막 몇 개월의 건의사항은 어느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무렵, 나는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현실의 퇴사는 매우 담담했다. 팀장 책상에 사직서를 내던지거나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한 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당당히 걸어 나오는 드라마 같은 그림은 없었다. 나는 절차에 맞게 팀 관리자 및 인사부서 담당자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고, 인수인계 기간을 감안하여 마지막 출근 날짜를 조율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직서에 들어갈 퇴사 사유만큼은 내 뜻대로 쓰고 싶었다. 어차피 떠날 회사니 그동안 쌓인 불만을 다 토해내자는 오기도 있었고, 내가 총대를 메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남은 동료들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어쭙잖은 영웅 심리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팀 생활을 하면서 느낀 모순들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몇 날 며칠에 걸쳐서 글을 쓰고 또 다듬었다.
그러나 가족과 지인들은 하나같이 내 결정을 뜯어말렸다. 일단 그만둘 회사라고는 해도,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모난 인상을 남겨서 좋을 것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세상일이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법이고, 어쩌면 그 회사의 누군가와 다시 마주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가능하면 누구와도 척지지 말고 무난하게 나오라는 설득이 이어졌다. "좋게 좋게 생각해." 그들은 말했다.
결국 나는 의지를 꺾었다. 반복되는 설득에 넘어간 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에 흔들린 가족들의 마음을 더 이상 헤집고 싶지 않았다. 나는 준비했던 모든 말을 포기한 채, 사직서에 '팀 부적응'이라는 네 글자를 간략하게 적어 냈다.
결재를 올린 지 몇 시간쯤 되었을까. 업무용 전화기의 벨이 울리더니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의 회사 관리자는 팀 운운하는 퇴사 사유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리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며, 보다 개인적인 사유를 적어서 사직서를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어투에서는 힐난의 뉘앙스가 느껴졌다.
나는 사실대로 쓴 내용을 바꿀 마음이 없다며 소심하게 저항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칠 줄 모르는 면담 릴레이였다. 윗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떠나도록 순순히 내버려 둘 마음이 없었다. "좋게 좋게 갑시다."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며칠 사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제날짜에 퇴사 못하는 거 아냐?' 결국 내 어설픈 저항은 '팀 부적응'이라는 네 글자를 '개인 사유'라는 또 다른 네 글자로 바꾸는 데 동의하는 초라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내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사직서에 들어갈 문구인데 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1605년 스페인에서 발간된 한 권의 소설을 통해, 나는 그 답을 대강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었다.
작중 인물들의 시선에서 본 그는 호감형 인물보다 '민폐 캐릭터'에 가깝다. 그가 기사도를 지킨답시고 벌인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은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고, 적지 않은 경우 폭력적인 보복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갈비뼈가 부서지며. 어금니가 몽땅 빠지고 귀가 잘려 나갔다. 모두가 예상했듯이 (또 두려워하듯이), 그가 소신 있게 지켜낸 신념은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되려 많은 것을 앗아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치 않은 정신을 지닌 이 인물은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영웅으로 각인되었다.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곧은 마음은 순수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비록 그 방법은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그의 의지는 세상살이에 지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회사 생활을 마치고 프리랜서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오랜만에 꺼낸 《돈키호테》의 책장 사이에서, 나는 이 위대한 미치광이 기사의 새로운 매력 하나를 발견했다. 돈키호테의 사전에 '좋게 좋게'라는 말은 (자매품인 '쉽게 쉽게', '대충 대충'이라는 말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깊은 산중에서 거대한 괴물의 쇠사슬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홀로 위험을 마주하러 떠난다. "나리, 지금은 밤인데다 보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도망간다 해도 겁쟁이라고 비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겁에 질린 산초가 만류하지만, 돈키호테는 물러서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그 '거대한 괴물'의 실체가 물레방아로 밝혀지며 모두의 비웃음을 사지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세상을 구하려는 그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사이 우리는 점점 '기사도'라는 신념이 광인의 헛소리인지 영웅의 위대한 목표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기사도를 장난삼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창끝을 겨눈다. "내 말은 나쁜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 없잖소." 상대가 변명을 늘어놓으면, 그는 이렇게 응수한다. "유감스럽게 생각할지 말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네."
아, 이 주옥같은 대사를 읽으면서, 나는 지난 몇 년간 그토록 나를 찝찝하게 했던 기분의 정체를 드디어 제대로 파악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던 그 상황에서 (혹은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면) 어떤 대답을 던져야 했는지도. "좋게 좋게 가자고요? 그게 좋은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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