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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시진핑의 작심 방북이 불러 올 나비효과

[취재파일] 시진핑의 작심 방북이 불러 올 나비효과
"날짜를 보지 말고 상황을 보세요."

올 초 베이징의 한 외교 소식통에게서 들었던 조언입니다. 당시는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이 가까워져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북설이 떠돌던 때였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4차례나 중국을 방문했던 터라 시 주석이 평양에 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날짜를 보지 말라"는 외교 소식통의 조언은 시 주석이 북한의 특정 행사일에 맞춰 방북할 일은 없을 거라는 의미였고, "상황을 보라"는 말은 시 주석이 북한에 가야 하는 상황, 즉 가야 할 이유가 생겼을 땐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외교소식통의 말대로 시 주석의 방북은 태양절 때도, 다른 행사가 있을 때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지난 20일 방북은 전격적이란 표현보단 시 주석의 작심(作心)으로 표현하는 게 옳은 거 같습니다. 시 주석은 이달 초부터 방북을 작심했고, 방북 날짜도 중국 측이 정해서 북한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진핑 주석이 최근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를 보고 북한을 방문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정은 시진핑 북중 정상회담 (사진=연합뉴스, 신화사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시 주석이 작심 방북을 철저하게 준비한 정황은 방북 과정에서도 확연히 읽어낼 수 있습니다. 먼저 허리펑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장관)을 방북 수행단으로 노출시킨 점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 때는 단 한반도 북·중 정상회담에 배석한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중국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 사령관인 허리펑 주임과 중 산 상무부장을 동시에 방북에 동행한 건 누가 봐도 의도적입니다. 북한의 제일 시급한 현안인 경제 문제를 중국이 돕겠다는 생색을 대놓고 낸 것으로 볼 수 있겠죠.

북·중 정상회담 내용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도했습니다. 시 주석이 평양에 도착한 당일 오후에 진행된 북·중 정상회담 내용을 저녁 7시 CCTV 메인뉴스에 장시간 보도했습니다. 속보가 당연한 우리나라에선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지만, 중국 매체가 북·중 정상회담을 이렇게 빨리, 그것도 초청국인 북한의 조선중앙TV보다 더 빨리 보도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시 주석의 메시지를 외부에 가능하면 빨리 알리고 싶었던 의도로 읽힙니다.
시진핑-김정은, 북중 우의탑 참배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방북 기간 동안 시 주석의 언행도 작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시 주석은 현 북·중 관계를 '전에 없던 신시대', '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이'로 표현했습니다. 또 북한의 안보와 발전에 대한 우려를 중국이 힘닿는 대로 돕겠다고도 약속했습니다. 국가 간 외교 수사,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어휘 사용이 다소 현란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시 주석의 발언 수위는 당초 방북 전부터 밝힌 북·중 우호 관계 개선을 위한 작심을 고스란히 담았다는 게 느껴집니다.

1박 2일이란 짧은 방북 일정에도 북·중 우호라는 목적이 명확한 방문지만 골라 마치 성지 순례하는 분위기를 내려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시 주석은 적어도 이번 방북이 김정은 위원장의 수차례 방중에 대한 외교적 답방을 넘어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당연히 관심은 시 주석이 이렇게까지 애정을 티 내면서 북한을 방문한 의도일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북한을 껴안고 한반도 영향력을 유지·강화해 이를 미국과의 갈등 상황에서 카드로 활용하겠다는 정도로 시 주석의 의도를 분석하는 게 가장 일반적입니다. 사실 시 주석이 미국과의 전방위에 걸친 갈등과 예전만 못한 중국 경제 상황 등으로 힘이 좀 달리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북한 카드를 돌파구로 선택했다는 데까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큰 이견은 없어 보입니다.

일단 시 주석이 북한의 마음을 끌어오는 데는 상당 부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도 대동소이합니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예상 밖 '노딜'로 인한 패닉을 겪고, 기대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섭섭한 대접을 받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손을 내밀기엔 적절했던 타이밍이었습니다. 시 주석 입장에선 어차피 한 번은 평양에 가야 했는데, 김 위원장이 가장 헛헛해하는 시점에 잘 맞춘 영리한 방북으로 효과를 극대화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내친김에 시 주석은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도 강조했습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말은 중국이 줄곧 얘기해왔던 바지만, 미·중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작심 방북을 감행한 시점의 발언의 의미는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찬 전 연설하는 시진핑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시 주석이 어떤 역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시 주석의 방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청와대와 정부는 시 주석의 방북이 발표된 시점부터 긍정적인 해석을 내놨습니다. 교착상태인 북미 회담의 조기 재개에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거죠. 한 외교 당국자는 너무 기대치를 높이는 발언 아니냐는 질문에 그냥 외교가에 흔히 쓰는 모범 답안이라고 이해하라더군요.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할 때 흔히 내놓는 외교적 논평이라는 설명입니다. 어쨌든 긍정 평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베이징 외교가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많은 듯합니다. 북핵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공언해왔던 시 주석이 김 위원장에게 미국과의 협상 재개에 어느 정도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것이란 분석입니다. 시 주석이 이렇게 해야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공인받을 수 있고, 결국 그런 영향력이 미·중 간 마찰 국면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중국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논리적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어쩔 수 없이' 북미 회담의 촉진자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중국의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과 한반도 문제의 안정적인 관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 주석의 방북을 꼭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해석하는 의견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적어도 북핵 문제만큼은 북·미 양자 문제라고 얘기했던 중국이 지금 시점에서 적극성을 띠는 것 자체가 심상찮은 조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이 현재 북미 양자나 남북미 구도에 끼어들어 4자 구도로 끌고 가려는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1/4 지분을 가진 플레이어로 나선다면 한반도 문제 해법은 더 복잡해질 거라는 건 당연하게 귀결되는 결론입니다. 특히 중국이 최근 처한 상황과 연결해보면 북한과의 밀착을 통한 영향력을 미국을 향한 견제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약 상황이 그런 방향으로 흐른다면, 중국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협조자, 촉진자가 아닌 방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빈관 산책하는 시진핑 주석, 김정은 위원장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다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번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외교 소식통의 다수 의견인 듯합니다. 그 근거로 중국이 4자 구도로 끌고 가려는 사전 움직임이 포착되는 게 없고,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배후론'에 난처해진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으로선 중재자 이상의 역할을 하기엔 스스로 부담스러운 처지라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중국이 북한을 조정하는 배후를 넘어 훼방꾼으로 낙인찍히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시 주석의 방북을 고수익을 위한 고위험(하이 리스크)을 감수한 작심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 주석의 방북 이후 김정은 위원장의 모든 움직임이 시 주석의 방북과 연결돼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김 위원장이 돌발 행동을 하게 된다면, 시 주석의 원래 방북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와 무관하게 또다시 중국 배후론을 넘어 중국 훼방론도 확산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우려에는 중국이 돌발상황 고위험까지도 사전에 대비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꼬리를 잇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거수일투족을 지구 상 어느 나라보다 면밀하게 검토하는 중국이 한반도 상황에 대한 예민한 분석과 검토, 돌발상황에 대한 대비는 기본적으로 갖춰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는 어차피 북·미 간 상황이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최저점을 찍고 더 나빠질 것도 없이 분위기가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중국이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영리하게 숟가락 올린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방북 환영 만찬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거 같습니다. 외교가 각국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전쟁이라는 명제 하에 시 주석은 이번 작심 방북으로 북한에 기댈 언덕을 내준 대신 북한을 관리할 수 있다는 영향력을 일정 부분 공인받았습니다. 하지만 영향력은 절대적이지 않고, 김정은 위원장의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안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돌발 상황에 대한 중국의 정교한 대비와 관리력을 믿는 쪽에선 시 주석의 방북이 한반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합니다.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이 다루기 힘든 북한을 잘 다독여준다면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그림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선순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희망대로만 진행되지만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람직한 선순환도가 그려지기 위해선 한반도 이해 관계국들이 하나같이 이성적인 정상궤도를 유지해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도 긍정적인 요소는 아닐 겁니다.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가 이어지는 건 미국과 북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돌발 변수가 튀어나올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중요한 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결과물이 늦지 않은 시간 내에 나와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가져보겠다는 인내심이 사라지기 전에,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허의 정치적 계산법이 발동하기 전에 말입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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