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취재파일] 여전히 불안한 귀갓길…"112 신고하면 뭐하나"

[취재파일] 여전히 불안한 귀갓길…"112 신고하면 뭐하나"

안희재 기자 an.heejae@sbs.co.kr

작성 2019.06.24 10:58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 "경찰을 믿으라고?" 잇따른 여성 대상 범죄와 무너진 신뢰

"112 신고하면 뭐하나. 잠깐 왔다 가버리는데." 지난달 말 '신림동 침입 남성' 사건 당시 경찰에 쏟아졌던 비판. 피의자가 간발의 차로 닫힌 여성 집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모습이 전국에 퍼진 상황에서 "건물 주변에 이상이 없었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CCTV 영상은 확인하지 않았다"는 경찰 해명은 더 큰 공분을 샀습니다. '경찰에게 보호받을 수 없다.' 신뢰가 무너지는 만큼 '내 몸은 내가 지킨다' 정신이 강해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강동서 암사지구대 귀갓길 여성 뒤쫓은 남성 검거 ▶ [단독] 귀갓길 여성 집 쫓아간 남성 "기분 안 좋아서"

그리고 한 달 뒤, SBS는 하룻밤 사이 귀갓길 여성 2명을 뒤쫓다 경찰에 붙잡힌 30대 남성 김 모 씨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여성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바싹 붙어 걷는 김 씨의 모습은 불안감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던 상황, 두 여성의 대응이 눈에 띕니다.

● 용기 있는 행동에 줄행랑, 하지만…

"이 빌라 사세요? 먼저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세요." 첫 번째 피해여성 A 씨가 주차장까지 따라온 김 씨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자 김 씨는 당황한 듯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집니다. 김 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 김 씨는 그제야 무사히 빌라 안으로 들어서죠.
강동서 암사지구대 귀갓길 여성 뒤쫓은 남성 검거두 번째 피해여성 B 씨는 좀 더 역동적(?)입니다. 엘리베이터까지 뒤따라 탄 김 씨가 층 버튼을 누르지 않자 "왜 누르지 않냐"며 묻고, 계단으로 급히 도망치는 김 씨를 1층으로 가 온몸으로 막은 겁니다. 격한 실랑이 끝에 김 씨는 옷이 찢어진 채 도주해버리고 맙니다. 김 씨는 다음날인 20일 자신의 집에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강동서 암사지구대 귀갓길 여성 뒤쫓은 남성 검거 ▶ 집 반대 방향 여성 쫓아놓고 '하소연 해명'…추가 범행 조사

위기의 순간 두 여성의 용기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뒤를 밟은 낯선 남성과의 일대일 상황에서 자칫 더 큰 피해를 당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B씨처럼 직접 몸싸움을 벌이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분석입니다. 남성이 흉기를 지니거나 흥분한 상태에서 해코지하려 한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우선 일대일 상황을 가급적 피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가장 좋다고 입을 모읍니다.

● "신고하라고? 오죽하면 직접 나섰을까"

다시 떠오르는 물음표, '경찰을 어떻게 믿고?' 실제로 이번 사건이 알려진 뒤 경찰에 대한 여론의 불신이 다시금 드러났습니다. 신림동에서의 부실한 초동 조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겁니다. "오죽하면 피해 여성들이 직접 나섰을까." 첫 번째 신고가 접수되고 두 번째 피해가 발생할 때까지 약 9시간, 경찰은 도대체 무엇을 했냐는 질타도 나옵니다. 18일 저녁 처음 피해가 발생하고 20일 오후가 돼서야 김 씨를 붙잡은 경위에 의구심을 갖는 이 역시 적지 않아 보입니다.

출동 경찰관과 목격자 등을 만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18일 저녁, "낯선 남자가 집 앞까지 뒤따랐다"는 신고를 받고 암사지구대 경찰관들이 출동합니다. 피해여성 A 씨를 만나 CCTV 영상을 확인했지만, 뚜렷한 신체접촉이나 집 안으로 강제로 들어가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A 씨가 용의자를 잡는 것 대신 주변 순찰만 강화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게 경찰 설명입니다. 현행법상 용의자를 잡더라도 경범죄 처벌 외에는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 내린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강동서 암사지구대 귀갓길 여성 뒤쫓은 남성 검거순찰차가 밤새 피해 지역에 집중 배치됐지만, 다음날 새벽 5시 40분쯤 근처 아파트에서 비슷한 신고가 접수됩니다. 이번엔 남성이 엘리베이터까지 쫓아왔다 도망갔다는 것. 전날 저녁 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한 암사지구대 경찰관들은 두 사건 기록과 지도를 펴놓은 채 CCTV 영상을 분석해 용의자가 동일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근처 상점에서 용의자를 안다는 증언을 확보한 경찰은 두 번째 범행 직후 소주 한 병을 사가는 남성을 발견하고 동선을 추적, 40시간 가량 잠복 끝에 20일 오후, 집에 숨어있던 김 씨를 붙잡습니다.

● '나를 보호해주는 경찰', 언제쯤?

신림동 건을 포함해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 경찰의 초동 조치에 아쉬움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는 지구대 노력에 새삼 눈길이 갔습니다. 통상 이런 신고가 접수되면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넘겨 처리합니다. 10명 남짓 1개 팀이 교대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복 잠복조를 운영하며 용의자를 쫓는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김 씨가 붙잡힐 때까지 피해 여성들에게 꾸준히 진행 경과를 알리고 불안감을 덜어주려 한 점도 돋보였습니다. 물론 당초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겠죠. 더 큰 피해를 막은 데 이들이 있었단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찰 초동 조치가 부실하거나 미흡한 사례는 여전히 곳곳에 보입니다. 며칠 전 인천에서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신고자가 폭행당하는 걸 뒷짐 지고 방관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찰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 맡기면 된다는 믿음은 결국 경찰 조직 스스로가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경찰을 어떻게 믿어?" "신고해도 소용없어" 불신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암사지구대의 노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를 기다려봅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