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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어민의 귀환 그 후…'간첩 아들' 꼬리표에 짓밟힌 삶

납북 어민의 귀환 그 후…'간첩 아들' 꼬리표에 짓밟힌 삶

김희남 기자 hnkim@sbs.co.kr

작성 2019.06.22 21:15 수정 2019.06.22 21:3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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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0년대, 70년대에 바다에 나갔던 어민들이 북한에 납치됐다가 돌아와서는 간첩으로 몰린 사건, 꽤 많았습니다. 다 해결됐겠거니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아닙니다. 아직도 진실을 밝혀달라면서 싸우는 가족들이 많습니다.

김희남 기자입니다.

<기자>

1971년 8월 30일 새벽 강원도 속초항을 출항해 오징어잡이에 나섰던 승해호는 사흘간의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김성학/당시 승해호 선원 : '앞코(뱃머리)에 걸라우' 그 말에 아 이거 북한 배가, 우리 북한 배한테 납치되는구나.]

선장인 아버지를 따라 함께 배를 탔던 김성학 씨는 1년 뒤에야 풀려났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려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악몽이 시작됐습니다.

곧바로 방위병에 소집된 그는 복무기간이 끝나갈 즈음 영문도 모른 채 북파공작원을 훈련하는 HID 부대로 끌려갔습니다.

[김성학/납북어민 간첩조작 피해자 : 너 북한에 갔다 와서 요시찰로 대한민국에서 살려면 무척 어려워. 네가 이 일을 잘한다면 잘 마무리해서 끝난다면 너 거기서 완전 사면시켜준다.]

'간첩 꼬리표'를 떼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1년 넘는 지옥훈련을 견뎌냈습니다.

이후 경기도 하남에서 전파사를 하며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꿈꿨지만 당시 국가권력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85년 12월엔 급기야 경기도 대공분실로 끌려가 악명높은 이근안에게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김성학/납북어민 간첩조작 피해자 : 너 전파사 하면서 라디오 같은 거 수리하잖아. (간첩용) 단파라디오 같은 거 없어? 하도 맞아서 이 안이 다 찢어졌어요.]

간첩으로 몰린 김 씨는 조작사실이 인정돼 1989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가폭력에 짓밟힌 지난 세월은 그 누구도 돌려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집계된 납북어선과 어민은 모두 459척 3,651명 이 가운데 1,327명이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조사에 나서 16건은 다시 재판하는 재심에 이르렀지만, 그나마 이명박 정부 들어 위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50년 동안 '간첩 아들'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야 했던 김창권 씨는 이제라도 고인이 된 아버지의 한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최근 재심을 청구한 상태입니다.

[김창권/강원 속초 : 우리 아버지는 참 억울하다. 육지(남한)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기에서 (북한으로) 월선 조업했다고 그냥 끌고 가서.]

현재 재심을 진행 중인 남정길 씨는 50년 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남정길/전북 군산 : (경찰에) 두 번 갔어요. 3년 있다가 또 잡아갔어요. 가혹행위, (발로) 밟았어요.]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 물고기 잡던 어부가 20년 전 불행하게 납북됐다가 온 것을 15년 20년 지난 다음에 두들겨 패서 간첩을 만들어놓은 것에 무슨 이념이 있습니까.]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이들의 짓밟힌 인권은 국가가 나서 구제해야 합니다.

(영상취재 : 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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