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차도에는 생각보다 많은 물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후진을 시도했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운전자 39살 박 모 씨는 어머니와 딸을 잠시 차에서 기다리게 한 뒤 밖으로 빠져나와 경찰과 소방에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신고는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시간당 최고 130mm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하철과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산사태로 경로당이 붕괴될 정도였습니다. 밀려드는 신고 전화에 박 씨의 구조 요청은 자꾸 뒤로 밀렸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야 소방대원이 출동해 차 안에 있던 어머니와 딸을 구출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2014년 8월 25일, 50대 할머니와 10대 손녀가 숨진 우장춘 지하차도 사고입니다.
● 배수 펌프 있었지만 먹통…계속되는 배전반 침수
지하차도는 지표 아래 설치된 탓에 비가 오면 물이 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배수 펌프가 설치된 이유입니다. 빗물이 도로 가장자리로 쏠려 집수정에 모이면 배수 펌프가 작동해 지하차도 밖으로 빼내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2014년 8월 25일, 부산에서는 우장춘 지하차도를 비롯한 두 개 지하차도의 배수 펌프가 모두 '먹통' 상태였습니다. 배수 펌프에 전기를 공급하는 배전반이 침수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부산만의 일이 아닙니다. 재작년에는 천안의 두 개 지하차도가 같은 이유로 침수돼 차량 7대가 침수됐습니다. 인천의 북항터널도 배전반 침수로 배수 펌프가 작동을 못 해 일주일 동안 차량 운행이 통제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는 김포의 지하차도가 배전반 침수로 빗물을 밖으로 빼내지 못해 차량 9대가 물에 잠겼습니다.
● 지하 배전반…국토부의 이상한 '설치 기준'
사고가 반복되는 건 배전반이 지하에 설치돼 있기 때문입니다.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전국 지하차도 573개를 살펴보니 235개, 41%가 배전반이 지하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침수 예상 높이와 같거나 심지어 낮게 설치된 곳도 전국에 58개에 달했습니다. 폭우에 예상 침수 높이까지 빗물이 들어차면 배전반이 멈춰버릴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대구의 경우는 관할하는 27개 지하차도의 예상 침수 높이는 물론 배전반 설치 높이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대구시 관계자는 "그런 데이터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 지상으로 옮기는 지자체, 한 곳당 3억 원 '예산 낭비'
사고가 잇따르자 지자체들은 지하에 설치된 배전반을 지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장춘 지하차도 사고를 겪은 부산시는 2015년을 시작으로 모두 14개 지하차도의 지하 배전반을 지하차도 밖으로 옮겼습니다. 서울의 경우도 2001년부터 지하차도 수십 곳의 지하 배전반을 지상으로 빼냈습니다. 부산시 관계자는 "기상 이변으로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 배전반이 지상에 설치되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재난기금을 재배정해서 급하게 작업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지상으로 배전반을 옮겨 침수를 예방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문제는 돈입니다. 부산시는 14개 배전반을 지상으로 옮기는데 41억 2400만원을 썼습니다. 지하차도 한 개당 평균 3억 원 정도가 드는 셈인데 서울은 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지하차도에 설치되는 배전반은 고압전류용이라 가격이 비싼 데다 옥외에 설치할 때는 지하에 설치된 건 버리고 새로 제작해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드는 것입니다. 김철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처음부터 국토부 설치 기준 자체가 제대로 됐다면 배전반을 지상으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다"며 "이상한 설치 기준 때문에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