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홍콩인 외면한 '홍콩인' 캐리 람의 추락

정성엽 기자 jsy@sbs.co.kr

작성 2019.06.18 16:37 수정 2019.06.19 18:4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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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 인도법안을 반대하는 홍콩인들의 시위는 '조직적 폭동', '버릇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홍콩 정부 최고수반이나 중국 중앙정부의 눈엔 지난 12일 밤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불과 닷새 만에 홍콩 행정장관은 자신이 규정했던 '폭도'들에게 자아비판을 하며 공개 사과했습니다. 강경 진압을 공언했던 홍콩 정부가 이렇게 단시간 만에 180도 태도를 바꾼 건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 권력 서열 7번째인 한정 상무위원이 홍콩 옆 선전시까지 직접 내려와 조율했다'는 현지 보도는 공식 확인된 바 없지만, 공산당 중앙의 지시 외엔 이런 드라마틱한 반전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범죄인 인도법안은 무기한 연기됐고 사실상 폐기 수순이지만, 홍콩인들은 시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홍콩 캐리람 (사진=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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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람은 홍콩의 5대 행정장관입니다. 둥젠화 초대 행정장관 이래 네 번째 사람이고, 최초의 여성 행정장관이기도 합니다. 1957년생인 캐리 람은 홍콩섬 완차이의 평범한 노동자 가정에서 다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홍콩 사람입니다. 홍콩에서 자랐고 공부를 매우 잘해 홍콩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82년 영국 유학 중에 린자오보(林兆波)와 결혼했습니다.

캐리 람의 이름은 린정위에어(林鄭月娥)입니다만, 원래 성씨는 정(鄭) 씨입니다. 결혼 후 남편 성씨인 린(林-광둥어 발음으로 람)을 따른 겁니다. 당시 영국 통치하의 홍콩에서 서양식 관례대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게 어색하지 않았던 서양 스타일의 홍콩 여성이었습니다.

당연히 홍콩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캐리 람은 열정적이고 책임감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이름을 알린 건 2007년이었습니다. 이 때는 영국령 홍콩 공무원이 아닌 중국의 홍콩특구정부 발전국장인 캐리 람은 영국 통치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건축물 퀸스피어 철거를 진두지휘했습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철거를 반대하는 수백 명의 시위들 앞에 나서서 퀸스피어의 역사적 가치를 지워버리며 '전사'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2012년 친중국 인사인 렁춘잉 행정장관의 눈에 들어 넘버2인 정무사 사장에 취임한 캐리 람은 친중국 성향을 확실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2013년 정치개혁 TF 책임을 맡게 된 그는 그다음 해 이른바 우산 혁명을 맞이합니다.
2014년 홍콩 행정장관(행정수반) 선거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2014년 9월 하순부터 12월 15일까지 약 79일간 이어진 민주화 시위인 우산 혁명1997년 일국양제라는 이름하에 중국으로 편입된 홍콩은 행정장관 선출 방식이 항상 논란이 됐습니다. 홍콩 시민이 직접 뽑는 방식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뽑는 간접선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홍콩 시민의 지지를 받는 후보보다 중국 중앙정부의 힘이 실린 후보가 행정장관으로 선출되는 구조입니다.

사실 홍콩인들이 직선제를 손에 거머쥘 뻔한 시절도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07년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 "2017년엔 직선제를 허용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깨버린 건 시진핑 주석이었습니다. 후보추천위에서 과반 지지를 받은 '애국적인 인사' 2~3명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하는 허울뿐인 직선제를 내놨던 겁니다.

2014년 '우산혁명'을 주도한 홍콩 시민의 핵심 요구사항은 행정장관 직선제였습니다. 중국 정부의 간섭 없는 온전한 민주주의였던 겁니다. 최대 50만 명이 나와 홍콩 중심지인 센트럴(中環) 지역에서 민주화 열망을 쏟아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우산 혁명이 캐리 람 입장에선 정치적 색깔을 명확하게 선택한 결정적 갈림길이 된 듯합니다. 우산혁명 지도부와 맞장 토론을 벌이며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습니다. 1천여 명의 시위대를 체포한 전형적인 싸움꾼 기질의 캐리 람을 사람들은 '철의 여인'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중국 정부도 캐리 람을 '차기 행정장관'으로 낙점했습니다.

내친김에 캐리 람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입후보했고, 당시 중국 권력서열 3위인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중국이 지지하는 유일한 후보"라며 캐리 람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줬습니다. 캐리 람의 행정장관 당선은 기정사실이 됐지만, 동시에 홍콩인들에게 캐리 람은 중국 중앙정부의 대변자로 각인됐습니다.
홍콩 캐리람/중국 시진핑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2017년 4월 예상대로 5대 행정장관에 당선된 캐리 람은 또 하나의 영광(?)을 안게 됐습니다. 시진핑 주석이 취임 후 처음으로 홍콩을 방문해 캐리 람 행정장관의 취임식에 참석했습니다. 홍콩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서슬퍼런 경고를 쏟아내는 시 주석의 곁에 다소곳했던 캐리 람 행정장관의 모습에서 홍콩 출신 엘리트 공무원은 사라졌고 중국 중앙정부만 바라보는 충실한 대변인만 남아 있었습니다.

범죄인 인도법안이 촉발한 이번 홍콩 시위에도 캐리 람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을 행정장관까지 이끌어준 성공 방식대로 대처했습니다. 시위대를 향한 강경 진압과 막말의 방식, 자신의 취임식 날 시진핑 주석이 공언한 강압의 방식 그대롭니다. 중국 외교부가 연일 캐리 람의 방식을 지지한다고 한 걸 보면, 캐리 람의 방식이라기보다 중국 중앙의 지시였을 가능성이 더 크겠군요.

하지만 캐리 람의 방식이건, 중국 중앙의 지시이건 딱히 구분해야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경찰은 홍콩 시위 사상 처음으로 고무탄을 발사했고, 최루가스를 눈에 대고 뿌려댔습니다. 시위대를 철없는 어린애로 비유하며 "어머니의 심정"이라고 말했던 캐리 람은 자신이 왜 철의 여인으로 불렀는지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의 저항 에너지가 더 컸습니다. 우산 혁명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100만 홍콩 시민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한 요구가 싸움꾼 캐리 람을 불과 몇 일 만에 손들게 했습니다.
16일 홍콩에서 열린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집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지금 캐리 람의 정치 생명은 최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홍콩 행정장관으로서 사실상 리더쉽을 잃었다고 대부분 평가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늘 바라보던 중국 중앙정부의 신뢰가 예전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번 시위를 대처하는 방식을 놓고 캐리 람이 친중파 인사들에조차 쓴소리를 들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실정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중앙 정부에 도전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던 시 주석의 공언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시 주석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는 얘깁니다. 여기에 중국 중앙정부 입장에선 미국과의 전방위 갈등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미국에 큰 빌미를 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분란을 일으켰다고 했던 자신의 사과 발언은 시위대가 아닌 중국 중앙정부를 향한 자아비판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캐리 람은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을 넘은 듯합니다. 캐리 람을 계속 지지한다는 중국 정부의 얘기는 캐리 람을 위해서라기보다 캐리 람 진퇴를 마지노선으로 생각하는 중국 중앙정부의 고육지책으로 들립니다. 적당한 구실이나 대안이 생기면 캐리 람은 언제든지 토사구팽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홍콩인이었지만 중국의 권력을 업고 홍콩인을 외면한 캐리 람의 드라마틱한 추락은 우리의 20세기 아픈 역사 속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바이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