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그는 '백'이 있어서 직장생활 너무 편하게 합니다."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SBS뉴스

작성 2019.06.15 10:27 수정 2019.06.17 16:1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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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꼰대' 5편: "그는 '백'이 있어서 직장생활 너무 편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통상 서로를 믿는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공정, 공평이란 토대 위에 생겨난다. 공정, 공평하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불신이 싹트고 불신이 고개를 내밀면 협력은 없어지고 결국 관계는 깨진다. 그래서 사람이 모여 사는 곳 어디나 그것을 중요시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웃기는 것은 정의는 (공정, 공평은 정의의 한 모습이므로)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대단한 무엇에 대해 엄격히 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팀 내에서 아침 당직 순번, 복사용지 바꾸기, 문서 수발, 정수기에 생수통 바꾸기, 커피 심부름 같은 이런 허접한 일에도 정의는 실현돼야 한다는 것. 사실 팀장 입장에서는 이런 일들은 팀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데 아무런 연관도 없는 하찮은 것들인데 팀원들 사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불공평한 상태로 놔두면 조그만 구멍 때문에 제방이 무너지듯 팀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와 보니 뭔지 모르게 팀 분위기가 싸했다. 그때 사내 커뮤니케이터가 깜박거린다. 저쪽 팀 후배 차장이다.

"팀장님. 점심시간 언저리 타임에 약간 시끄러웠어요. 윤 사원과 도 사원이 심하게 말다툼했답니다. 이걸 내가 왜 하냐, 너는 왜 안 하냐 하면서요. 제가 말하기는 그렇고요, 알아보세요."

팀 내 선임인 김 대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다. 김 대리는 잠시 주저하다 방금 전 사건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둘이서 항상 티격태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터진 거죠. 도 사원은 아침 당직을 여직원인 윤 사원이 안 서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고 윤 사원은 문서 수발을 자기만 하는 것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렸는데, 조금 전에 복사기 용지 바꾸는 것 때문에 그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복사기 용지 바꾸는 거?"

"예. 윤 사원 옆에 프린트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윤 사원이 용지가 떨어지면 주로 바꿨죠. 그런데 아까 도 사원이 뭔가를 프린트했는데 나오지 않자 윤 사원에게 A4를 좀 채워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윤 사원이 좀 성난 목소리로 도 사원도 할 수 있지 않냐 했고, 그렇게 말다툼하다가 당직 얘기 나오고 문서수발 얘기 나오면서 서로 목소리가 좀 커졌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둘 다 불러 나무라고 싶었지만 그러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잠시 숙고한 후 도 사원에게 잠시 현장 지점에 같이 가자며 운전을 부탁했다. 가는 도중 업무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아까 일을 꺼냈다.

도 사원은 순간 놀라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얼버무리는 것 같아서 재차 확인하니, 그가 곤혹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불공평한 대접을 받아서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윤 사원은 백이 있어서 그런지 직장생활 너무 편하게 합니다. 힘든 일 다 열외이고 칼퇴근합니다. 그런데 복사지 가는 것도 안 한다고 하니 그만 욱했습니다. 허드렛일, 심지어 커피 심부름도 제가 다 합니다. 만만한 제가 다 하죠."

"잠시만, 백? 무슨 백?"

"윤 사원 아버지가 유명인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 팀장도 윤 사원에게 싫은 소리 잘 못하고 아침 당직도 제외해 주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전에 윤 사원 집안이 좋다는 얘기는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대책 없이 칼퇴근을 했어도 내가 보기엔 누구에게 특별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도 사원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평소 사이가 원만치 못했고 오늘 결국 다툼을 벌인 거야?"

침묵은 긍정이다. 나도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생각했다. 불공정은 사람을 매우 비정상적으로 만든다. 직접적인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차별 대우, 좋은 기회 빼앗김, 승진 누락 같은 것들. 이런 피해가 모이고 모이면 그 누구라도 지금 당장 혹은 미래에 회사에서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두려움은 자기 방어 기제를 강화해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한다.

사실 나도 그랬다. (사람인지라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누군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우연히 읽고 대오각성은 했다.

(중략) 다른 이야기지만 신기한 것이 또 있다. 입사할 때 출신이 달랐던 사람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대단한 백으로 입사한 친구들도 지금 그들의 처지를 보면 흙수저로 입사한 우리 동기들에 비해 더 잘 돼 있지도 않다. 특히나 건방을 떨던 금수저들은 후광이 없어지면서 자연히 퇴사했다. 남아있더라도 미관말직에 있을 뿐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잘 나가는 사람이 분명 있지만 그 이유는 백이 아니라 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편파적일까? 어느 정도는 (특히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살아보니 그렇다. 여러분도 실제로 이를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남부러울 것 없던 재벌이 늘그막에 인성 쓰레기로 밝혀져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권력의 정점에서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이기적 인사들이 적폐 세력으로 간주되어 감옥에 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교만한 금수저는 당장은 흥할 수 있으나 언젠가는 고꾸라지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삶은 부메랑이기 때문이다. 악하고 교만한 생각, 행동, 말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이것을 도 사원에게 말해줬다. 당장의 불공평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면서. 도 사원은 수긍을 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한다. "커피 심부름 안 했던 사람도 부메랑에 맞겠죠?" 이 말에 나는 크게 웃었다. 그가 알아들었구나 하며 좋아했지만, 속으로는 '이 친구도 박 대리나 윤 사원처럼 알아들은 척하는 거겠지'라고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했다.

외근을 마치고 다시 회사에 돌아왔다. 윤 사원과도 얘기해야 한다. 퇴근시간 전에. 헉,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윤 사원이 면담을 신청했다. 아이고, 겁난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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