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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의 "싫어요"가 좋은 이유

김지미 | 영화평론가

[인-잇] 그의 "싫어요"가 좋은 이유
"싫어요."

영화 <배심원들>에서 8번 배심원 권남우(박형식)는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목격자가 있고, 동기가 있고, 자백이 있는 그 재판에서 답은 명백해 보였다. 배심원 의무 때문에 정지당한 자기 삶으로 빨리 복귀하고 싶었던 다른 배심원들은 예상치 못한 그의 답변에 기함을 하거나 실소를 터트린다.

아픈 몸으로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 세상과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분노조절장애자, 기억이 안 난다며 발뺌하는 철면피.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피고인의 모습이었다. 권남우는 우연히 피고인의 이면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싫어요."라고 대답한 것은 다른 배심원들이 정해놓은 답변이 아니라 과정에 관한 것이었다. 권남우가 모욕적인 힐난 속에서도 자기 고집을 놓지 않은 것은 누군가의 일생이 다른 이의 업무나 피로감 혹은 조바심 때문에 쉽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믿음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배심원들>은 유무죄를 따지는 진실공방보다 법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더 충실한 영화다. 갈등을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었나'가 아니라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편견, 부실수사, 무엇보다 과중한 업무가 그 원칙이 지켜지는 데 장애물이 된다.

익숙한 속도에 맞춰 일을 처리해 나가다 보면 효율성이 좋아진다. 하지만 때로는 그 효율성에 속아 애초에 우리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영화 속의 김준겸 판사(문소리)가 난생처음 법정에 선 배심원들을 빨리 가르쳐 결론에 도달하려 한 것처럼.

권남우의 "싫어요."는 삶의 속도에 속아 원칙을 잊어버린 이들을 깨우는 제동장치다. 남우에게 유죄 평결에 동참할 것을 종용하던 다른 이들은 그 사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에게 가르치려 든다. 그들은 남우에게 '네 생각은 틀렸고, 옳은 결론은 이것이다.'를 반복적으로 강요한다. 남우는 그런 그들에게 "아니에요. 당신이 틀렸어요."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 결론이) 싫어요."라고 말한다.

"틀렸어요."와 "싫어요." 사이에는 상당한 태도의 격차가 있다. "틀렸어요."는 말하는 주체가 아닌 듣는 청자를 규정하는 말이다. 반대로 "싫어요."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말이다. "틀렸어요."는 '나의 옳음'을 위해 '당신의 그름'을 필요로 한다. 이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 '이해'가 끼어들 수 있는 자리는 협소해진다. 누군가가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틀린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틀린 상대는 교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싫어요."는 말하는 주체의 심리 상태를 기술한다. 이때 듣는 청자는 '싫음'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듣는 이는 싫음에 동의하지 않고도 말하는 이의 취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해하는 것이 꼭 싫음에 동조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 넌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셜 로젠버그는 『비폭력 대화』에서 타인과 조화로운 대화를 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나'를 주어로 한 문장을 쓸 것을 제안한다. 분쟁의 많은 원인은 타인이 어떠한지를 규정하려는 화법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애인이 내 생일을 잊어버려 속상할 때 "넌 나한테 관심도 없구나."는 다툼으로 연결되지만 "네가 내 생일을 잊어버려서 너무 속상해."라고 말하면 상대의 공감을 살 수 있다. 남우가 "싫어요" 대신 "당신들은 너무 독단적이에요."라거나 "당신들의 추정이 틀렸어요."라고 말했다면 다른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때로 사람들의 관계는 갈등을 낳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갈등에서 누가 옳은지를 따지려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인터넷 게시판에 넘쳐나는 "제가 이상한가요?", "저만 이런가요?" 류의 글이 실제로 구하는 답은 "원글님이 맞아요. 그 친구/가족/애인/상사가 이상해요/나빠요."인 경우가 많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수고까지 안 하더라도 우리의 많은 대화가 이런 식으로 소모된다. 그 대화의 뒷맛은 개운하지 않다. 결국 내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의 뒷담화를 늘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싫어요."라는 답을 내밀어 볼 수 있다. 꼭 누가 옳거나 그르지 않아도 그 상황이 싫거나 좋을 수 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싫음'이 타인의 속성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나는 내 마음의 싫음을 잘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 여기에 타인의 동의는 필수가 아니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혹은 어떤 상황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다수에게 그저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8번 배심원 남우는 이 "싫어요."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보여줬다. 우선 자신이 그것을 왜 싫어하는지 설명하고, 그 다음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자기 마음에 거리낌이 줄어들도록 실제 상황을 바꿔나갔다. 결국 그의 진심은 자신의 권위와 업무에 눌려 초심을 잃어버렸던 판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에게 자신의 "싫어요."를 말할 수 있는 강단과 타인의 "싫어요."에 귀 기울이는 포용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사진=영화 '배심원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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