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늦깎이 편집장의 독서모임 진출기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늦깎이 편집장의 독서모임 진출기
봄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마침 아무도 없다. 마음이 둥둥, 흥분과 설렘이 올라온다. 일단 계란 하나 탁 풀어 매콤한 라면을 끓인다. 책장에 가서 엄마가 외판원 아저씨의 말발에 홀랑 사주신, 아동문고 전집을 쓰윽 쳐다본다. 오늘은 뭘 읽어볼까나. <초원의 집>을 빼어들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냄비를 가져온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들이치는 거실에서 호로록 라면을 먹으며 책장을 넘긴다. 그리스 앞바다로, 리비아의 사막으로, 인디언 숲으로…. 간혹 주황색 국물 자국이 새겨지지만 괜찮다.

책 읽기를 떠올릴 때면 원형처럼 박힌 가장 행복한 기억이다. 아동문고를 떼고 그 후로도 숱한 책을 읽어오는 동안 언제나 독서란 고독의 다른 이름이었다. 도서관 한가운데서도, 음악과 수다가 흐르는 카페에서도, 만원 지하철 안에서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악착같이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만의 시간을 탐미하려는 몸짓이었다. 그 내밀한 고독의 조각을 굳이 누군가와 나눌 필요는 없었다. 책 취향이 같은 친구가 있다면 모를까, 내게 책 읽기란 말 사이엔 '혼자'라는 단어가 숨어있었다.

몇 년 전부터 '함께 읽기'라는 키워드가 세상에 맴돈다. 함께 책을 읽다 보니 인생의 고비도 넘겼다는 '간증'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렇긴 해도 바쁜 일상 중에 간신히 떼어낸 혼자만의 시간마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까. 갸우뚱하던 찰나, 조금 묵직하게 다가오던 그 움직임이 밀레니얼들의 경쾌함과 디지털 기반 플랫폼들을 만나면서 심상찮은 트렌드가 되어갔다. 함께 읽기가 새로운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성공한 비즈니스로도 안착하는 중이었다. 굉장히 새롭다기보다 우리 일상과 가까운 아이디어인데, 정작 책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왜 생각지 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혼자 읽기를 고집하던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나도 한번 그 흐름에 몸을 맡겨보기로. 모여서 실제같이 낭송하거나, 각자 읽은 내용을 가지고 토론을 하거나, 슬로 리딩을 목적으로 하는 등 독서모임의 형태도 굉장히 달랐다.

마침 엄두가 나지 않던 '인공지능' 주제에 대한 북클럽이 있어 덜컥 신청을 했다. 요즘 '핫'하다는 이 클럽의 특징은 모임 전에 독후감을 내지 않으면 아무리 회비를 냈어도 당일 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모르는 용어가 난무하는 책을 어쨌든 끝까지 읽어야 했다.

첫 모임 날,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물론 그중에는 꼭 이 주제의 책을 읽고 싶어서라기보다 나처럼 '업자'의 사심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새로운 트렌드를 맛보려고 온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 분들과는 괜히 눈이 마주칠까,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자기소개 시간, 랜덤으로 유쾌한 질문을 던지며 슬슬 마음이 풀려갔다. 경쾌한 분위기였지만 토론의 내용이나 오가는 의견 수준은 깊었고 몰입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첫날부터 투 머치 토커로 찍힐까 봐, 일단 열심히 듣고 맥락을 따라가려 애썼다.

점차 혼자서는 이해가 잘 안 되었던 내용들이 다른 사람들의 해석과 설명을 들으면서 실체가 잡히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세 시간 넘게 너무 집중했던 탓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엔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오랜만에 뇌가 이쪽저쪽에서 자극을 받는, 꽤 근사한 피로감이었다.

이후에도 함께 읽는 분들과는 강연회 정보나 심화 자료를 서로 공유하며 응원과 격려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혼자라면 결코 읽어내지 못했을 책들, 또 내 업의 테두리에선 쉽게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그들이 선사한 다양한 지적 자극과 함께 한 4개월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주의력을 강탈해가는 유혹의 한가운데 살아간다. 엄청난 연결망 속에 있지만 제대로 된 소통의 맛을 보긴 어렵다. 한시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알고리듬이 나에게 맞춤한 정보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가운데, 긴 시간을 할애해 책 속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일은 점점 더 불편하고 힘들어진다.

그때 이러한 독서모임은 큰 힘을 발휘한다. 연결의 힘 속에서 함께 읽고 듣고 나누는 과정은 스스로 몸과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고, 산란이 아닌 확장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 된다. 내 안에서만 어렴풋이 맴돌던 생각의 조각들이 타인과의 토론 속으로 휘감기며, 좀 더 단단하고 완결성 있는 콘텐츠로 재생산된다. 물론 독서모임도 주제, 구성원, 결속력 등에 따라 '케바케'이겠지만, 한 번쯤 참여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내가 그런 모임을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함께 책을 읽는 독서 공동체는 한 사회의 지적, 정서적 건강성을 떠받치는 굳건한 토대를 이룹니다." <같이 읽고 함께 살다>라는 책에서 장은수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다. 이처럼 책을 매개로 한 느슨한, 때로는 단단한 취향 공동체가 개인들의 인생에도, 책 문화에도 건강한 비료 같은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올여름에는 미래 기술에 대한 책을 '함께' 읽어볼 참이다.

#인-잇 #인잇 #이혜진 #주름살은별책부록
인잇소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