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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노조 할 권리, 갖고 계신가요?

- 'ILO 핵심협약'을 이해하는 쉬운 해설서

[취재파일] 노조 할 권리, 갖고 계신가요?
● "경찰이 시신을 빼앗아 갔다"

2014년 5월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병원 장례식장에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무려 3개 중대, 240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었습니다. 경찰은 "유족이 가족장을 원하는데 조문객들이 시신 운구를 막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고 출동 이유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문객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부모님에게 절차를 위임받아 장례를 진행하고 있었다"며 "갑자기 고인의 아버지가 마음을 바꿨고 난데없이 수백 명의 경찰이 장례식장에 들어와 시신을 빼앗아 갔다"고 했습니다.

공권력이 나서서 시신을 빼앗아 간 이 황당한 일은 '염호석 시신 탈취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염호석 씨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이었습니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의 하청 업체 노조 위원장이었던 셈입니다. 염 씨는 노조 활동을 한 이후부터 회사 일감을 받지 못했습니다. 월급이 채 100만 원이 되지 않은 채 몇 달을 지내다 생활고를 못 이겨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승리하면 해가 뜨는 이곳에 뿌려주세요"

검찰이 수사에 나서 지난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검찰은 "고인의 뜻인 '노조장' 대신 '가족장'을 치르게 하기 위해 삼성이 경찰에 1천만 원, 고인의 아버지에게 6억 원을 건넸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염호석 시신 탈취'는 "삼성의 전사적 역량이 동원된 조직범죄"라고 규정했습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확산해 노조가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삼성이 시신 탈취까지 감행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정동진에 있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도 하죠.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회가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이 싸움 꼭 승리하리라 생각해서입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저희가 승리하는 그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 그가 유서에 남긴 마지막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 계속되는 노조 와해…노동은 하지만 노동자는 아닌 그들

염호석 씨가 겪은 노조 와해 공작은 지금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노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이들이 대상입니다. 염 씨 같은 하청 업체 직원이나 계약직 근로자들입니다. 이들 노동자는 노조를 조직해도 별 힘이 없습니다. 하청 업체 노조는 원청과 교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염호석 씨는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업무 지시를 받았지만 정작 협상은 삼성전자서비스가 하청을 준 양산센터와 해야 했습니다. 노조가 맘에 안 드는 원청 입장에서는 일감을 배제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손쉽게 노조를 무력화했습니다. 계약직인 비정규직 근로자의 경우도 노조 설립이나 활동을 이유로 계약 연장을 못 해 해고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노동은 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입니다. 화물차나 건설 기계를 소유해 기사 업무까지 겸하는 자영 노동자, 셔틀버스나 대리운전, 퀵서비스 기사, 간병인, 방과 후 강사들입니다. 이들은 현행법상 '사장님'으로 분류됩니다. 개인 사업자로서 일종의 '용역 계약'을 맺었다고 보기 때문인데 노동자가 아니어서 근로기준법 적용도 받지 않고 노조를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2014년 기준 이런 특수고용노동자는 250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 10명 중 1명꼴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노조 할 권리'는 사실상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전국 단위 대리운전 기사들의 노조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설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조인 건설노조도 위원장이 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유로 수년째 고용노동부가 위원장 변경 신청을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노조를 만들어도 인정받기 어려우니 사용자 입장에선 이들의 교섭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크지 않습니다. 실제 지난 15일 대리운전노조 경남지부는 "20여 명의 대리운전 기사에 대한 배차 제한과 6명의 노조 간부 영구 제명, 열성 조합원 1명 등록 거부 등 노조 말살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노조 한다고 잘라 버리는 일'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
● ILO 핵심 협약 "최소한의 기준"

국제노동기구, ILO 핵심 협약은 바로 이런 '노조 할 권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해고자든 실직자든 특수고용노동자든 계약직이든 모두에게 노조 할 권리를 주라는 것입니다. 실제 업무에 대한 책임이 있으면 원청과의 교섭도 촉진하고 무엇보다 노조 한다고 해고해버리는 일은 막야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ILO 헌장은 이 결사의 자유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평화를 확보하는 수단의 하나라고 천명합니다.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사실 ILO 핵심 협약 자체가 모두 '최소한의 기준', 즉 기본에 해당합니다. ILO에는 '핵심 협약', '거버넌스 협약', '일반 협약' 등 모두 189개의 협약이 있습니다. 핵심 협약은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8가지를 말합니다.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균등대우, 아동노동 금지 안에 각 두 개씩 있는 협약이 바로 핵심 협약입니다. 이름만 봐도 왜 기본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8개 핵심 협약 중 결사의 자유와 강제 노동 금지에 관한 각 두 개의 협약, 즉 4개의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전체 189개 협약 중 29개를 비준한 상태인데, OECD 국가 평균 61개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입니다.

'노조 할 권리'를 다룬 결사의 자유에 대한 협약 비준은 우리 정부가 오래 전부터 추진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우리나라는 91년 12월 ILO의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국제적 외교무대에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됐고 한국 노동 환경의 실상을 알림으로써 국내외 오해와 불신을 해소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1996년 OECD 가입 때는 물론 98년에도 결사의 자유에 관한 핵심 협약을 모두 비준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최근 정부가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 2개와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협약 하나 등 미비준 협약 4개 중 3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게 실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실 결사의 자유에 대한 협약은 우리 헌법 33조에 있는 근로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경총 압수수색
● 경영계 반발에 막힌 핵심 협약 비준

경영계는 ILO 핵심 협약 비준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경총은 "세계적으로 국가 경쟁력의 최대 걸림돌로 평가되는 대립적, 갈등적 노사관계와 법제 속에서 노동계의 단결권만 확대할 경우 부작용과 우려가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전경련도 "먼저 법 개정을 하고 나중에 비준하는 방식이 합리적인데 이 절차를 준수하지 않아 노사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미국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도 결사의 자유에 대한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가 비준을 추진하는 걸 비판하는 것입니다. 다만 ILO 핵심 협약을 비준하겠다면 파업 시 대체 근로를 허용하고 사업장 점거를 금지하며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두 파업의 효과를 줄이는 제도입니다.

이런 경영계 요구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립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결사의 자유 협약을 논의한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계 요구는 파업을 무력화하자는 것으로 노동계가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안을 꺼내 든 것 자체가 핵심 협약 비준을 하지 말자는 소리"라고 비판했습니다. 미국이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미국은 연방제 국가이기 때문에 비준하려면 모든 주의 동의가 필요해 절차상 어려운 점이 있다"며 "결사의 자유에 대한 협약은 비준하지 않았지만 세계 최대 노동단체인 AFL-CIO를 필두로 한 미국 노조의 힘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막강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직적이고 대립적인 노사 관계를 감안하면 노동계에 단결권 확대라는 무기를 주려면 경영계에도 어느 정도의 무기를 주는 건 필수"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병태 교수 역시 "ILO 핵심 협약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 "핵심 협약 비준 더 늦출 수는 없어"

노동 전문가들은 ILO 핵심 협약 비준을 더 늦춰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핵심 협약은 기본이기 때문에 일단 비준하는 게 맞고 실제 경영계가 우려하는 일들이 발생하면 그때 경영계 요구를 검토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승욱 교수는 "노사 관계가 대립적이고 적대적인 이유 중 하나가 경영계가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핵심 협약 비준을 노사가 서로를 적에서 파트너로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ILO 핵심 협약이 비준되면 노조의 힘이 너무 강해져 경제가 파탄 날 것이라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파업 과정에서 노조가 행사한 폭력이나 폭행, 재물 손괴 등 폐해도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ILO 핵심 협약 비준은 이러한 행동마저 눈 감아 주라는 게 아닙니다. 공공질서 파괴행위는 그 행위대로 엄중히 처벌하되 이를 이유로 노조 할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핵심 협약은 '기본'이고 '최소한의 기준'이며 '글로벌 스탠다드'입니다. 실제 핵심 협약을 비준한다고 해도 염호석 씨가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와 바로 교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수고용노동자들 역시 노조를 만들 수는 있어도 어떻게 단체 교섭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습니다.

ILO 핵심 협약 비준은 어떻게 실행하고 구체화하는지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첫발을 떼고 입법을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노동자의 시신까지 탈취한 염호석 씨 사건은 분신자살한 전태일 씨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들의 요구는 노조 할 권리를 달라는 것과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태일 씨가 세상을 떠난 지 49년이 됐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본을 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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