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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베스트셀러 휩쓴 '우울'…"함께 나눌 용기"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베스트셀러 휩쓴 '우울'…"함께 나눌 용기"
그 오빠네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은, 동네 아줌마들의 쉬쉬하는 몸짓과 함께 들려왔다. 아직 중학생이던 오빠가 제일 먼저 발견했단다. 어른들은 그것을 '자살'이라고,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생애 처음 접했던 우울증은 엄청난 공포, 영원한 이별을 떠올리게 했지만, 어린 내 삶의 인접 거리에는 도착하지 않은 추상적인 고통일 뿐이었다.

우울증이란 단어가 내 생활권으로 불쑥 들어온 건 서른 살 작은 원룸에서였다. 늦은 퇴근으로 회사와 꽤 멀었던 집에선 잠만 자고 나오기 바쁜 때였다. 독립을 하기엔 엄두가 안 났는데, 마침 회사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친구가 자기 집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했다. 집이라 하기엔 아주 작은 원룸, 거의 얹혀사는 셈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와 깔깔거리며 회사 욕이며, 서툰 연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엠티라도 간 듯 즐거웠다.

그렇게 상냥하고 명랑하던 친구가 이유 없이 아프기 시작한 건 한 계절쯤 지났을 때였다. 점점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는 날이 늘고,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 의학 상식 책을 만들던 나는 책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엉성하게 짜깁기해 '야매' 진단을 남발했다. "아무래도 너 갑상선에 이상이 생긴 거 같아. 문제는 스트레스야. 운동이라도 좀 해봐!" 한참을 못 자고 한참을 울고 한참을 무기력해하던 친구가 부모님과 큰 병원을 다녀오고 나서야 내 진단은 멈췄다. 우울증이라고 했다.

친구는 뻘에 빠진 사람처럼 자꾸 가라앉았지만, 필사적으로 다시 나오려고 애를 썼다. 아침도 안 먹던 이가, 새벽부터 일어나 몸에 좋다는 식사를 만들고 컴컴한 밤 홀로 불면과 싸우면서도 아침엔 눈을 떴고, 몇 시간째 눈물이 멈추지 않아도 으깨진 마음을 싸매고 꼬박꼬박 출근했다. 그날 아침도 너무 울어 진이 다 빠진 친구를 안아주고 나오며, 뭐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한없이 서툰, 겁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뭘까.

어느 새벽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떠보니, 친구가 몸에 좋다고 미역국을 끓이고 있었다. "있잖아, 그거 내가 매일 끓여줄게." 다음날부터 나는 미역국을 끓였다. 미역이 떨어진 날은 밤에도 동네 편의점을 헤매기도 하고 본가에 가는 날은 미리 끓여두었다.

솔직히 '매일'이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는 얼마 뒤 회사를 그만두고 부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꽤 오래 힘든 시간을 보내고서야 일상으로 돌아왔다. 우울증이란 누구든 언제든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암흑의 문이다. 그 문을 열고 나오기까지 수많은 고통의 방을 거쳐야 하고, 한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친구의 아픔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

지난가을, 국내 최대 독립출판 축제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열렸다. '힙'한 독립출판물과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러 온 젊고 싱그러운 인파들로 북적였다. 둥둥 떠밀려 구경하다 관람객과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는 한 여성 작가의 부스가 눈에 띄었다. 그녀가 쓴 책은 놀랍게도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말이 등 뒤로 맴돌았다. "작가님 책 보고 완전 제 이야기인 것 같았어요. 이런 책 내주셔서 고마워요." 화사한 전시장에서 20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반가워하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내가 그동안 '우울증 환자'라 생각해오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어디 그뿐인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이 이미 출판계를 강타했다. 젊은 취향의 경쾌한 제목 때문이라고 하기엔, 정신과 상담기를 풀어낸 책을 그 많은 사람들이 읽을 리 없다. 자신의 우울을 호소할 데가 마땅찮은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거였다. 책은 지진계처럼 아주 섬세하게 당대 사람의 마음과 생각, 삶의 균열을 감지하고 반영한다. 서점에 가서 한번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책들이 우울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마저 이제 '유행'이 되어버린 걸까,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 유독 나약해진 걸까. 아니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라고 말했다. 사회라는 거대한 망 속에서 끝없이 나의 존재를 세상 기준에만 맞추며, 내 감정을 누르다 보면 마침내 당도하고 마는 종착지라고. 가족에게조차 제대로 공감받지 못하는 빈약한 관계 속에서 온 존재가 정서적 허기에 허덕거리는 것이라고.

젊은 사람들의 우울에 대한 자기 고백이 늘어나는 것, 노인 계층의 우울증 비율이 줄어들지 않는 것, 출처 미상의 우울증 테스트가 수도 없이 늘어나는 것. 갈수록 복잡해지고 숨 막히는 이 시대의 씁쓸한 일상 풍경일 뿐이다. 우울에 대한 책은 계속 쓰일 것이다. 그러나 책으로라도 고백하며 숨통을 여는 것, 꼭꼭 숨기지 않고 함께 나눌 용기를 갖는 것은 나름의 건강한 SOS 일지도 모른다. 책을 통해 서로 부축해주는 것이리라.

그때 친구의 작은 원룸에서 이런 이야길 많이 했다. 우리 이제 서른 살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앞이 컴컴한 게 하나도 안 보이는 거 같아 불안해. 매일 미역국을 끓이지 못한 게 못내 미안하다. 서툴지만 그렇게라도 친구를 힘껏 부축해주지 못한 것이.   

#인-잇 #인잇 #이혜진 #주름살은별책부록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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