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의 사회학①] 필리핀 기지촌 여성의 싸움을 한 번 더 기록하는 이유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작성 2019.05.21 10:18 수정 2019.05.21 14:2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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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동두천 기지촌의 미군전용 클럽 (사진=연합뉴스)● '양공주', '양색시'에서 '미군 위안부'로

거기(성병관리소)로 끌려가면 거기서 인제 놔주지, 주사를. 페니실린 맞고 죽는 사람도 있구. 부작용이 나서. (주사를 맞고 나면) 걸음을 못 걸어. 이 다리가 끊어져나가는 것 같애. 그걸 이틀에 한 번씩 맞춰줘. 아니, 변소 칸에 가 가지고 변소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죽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것만 맞는다 하면 덜덜 떨었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김정자의 증언록 中)

1970년대 김정자 씨가 동두천 미군 부대 앞에서 성을 팔았던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엄연히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 부대 앞 유흥가, 일명 '기지촌'은 이처럼 정부의 적극적 관리 속에 유지된 성매매 지역이었습니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건강보다는 미군 병력에게 '성병'을 옮기지 않는 것이 정부의 주된 관심사였고,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성병균 퇴치'를 위한 대대적인 관리가 상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국가 안보와 외화벌이를 위해 자국민에게 행사된 국가의 예외적 권력. 연구자 캐서린 문은 이 양태를 연구한 저서에 '동맹 속의 섹스'라는 이름을 붙였고, 사회학자 이나영은 공식적 금지와 비공식적 규제가 혼재된 '위선적 금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양공주, 양색시 등으로 일컬어지던 기지촌 여성들의 존재는 기나긴 국가배상 소송 과정에서 다시 정의됐습니다. 국가의 적극적 기획 속에 유지된 '미군 위안부'로 말입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 22부 (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는 지난해 2월 "정부는 미국과 군사동맹을 공고화하고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 성으로 표상되는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인격 자체를 활용했다. 이는 인권 존중 의무를 위반한 위법행위"라고 판시했습니다. 국가가 자국민의 성을 도구로 관리하고 이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겁니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세움터,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법원 앞 삼거리에서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한 참가자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 판결은 오랜 기간 투쟁을 벌인 기지촌 여성들에게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스스로의 예외적 권력행사를 돌아보고 책임을 인정하라는 이 판결은 우리 국가권력에게 한 차원 높은 '성찰성'을 요구한 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김정자를 비롯한 기지촌 여성들이 재판을 통해 얻은 성취는, 더 나은 국가권력을 향유할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 한국 여성이 떠난 자리, '글로벌 외주화' 된 기지촌

전체적으로 약 15개소의 클럽, 그리고 1개 업소에 보통 1~2명이 남아있으며 몇 년 전부터는 새로 유입되는 여성들이 거의 없다. (파주군 연보, 1995)

1990년대 이후, 기지촌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1992년 미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윤금이 씨 사건으로 기지촌 여성의 처우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됐습니다. 성병에 감염된 기지촌 여성 일부가 수용되던 경기여자기술학원은 1995년, 감금 상태를 못 이긴 수용 여성의 방화로 37명의 희생자를 남긴 채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기지촌 여성들을 수용하던 성병관리소도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한국 여성들은 점차 기지촌을 떠났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바다 건너 영어를 쓸 줄 아는 저소득 국가 여성들이었습니다. 주로 필리핀, 러시아 국적의 여성들입니다. 정부는 이들에게 일명 '준연예인비자', E-6-2 비자를 발급해주었고, 이들은 명목상 '공연 등을 목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기지촌에 유입됐습니다. 기지촌의 예외 상태는 적어도 겉으로는 많이 축소되었고, 내국인이 떠난 어두운 자리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 가수로 들어와 강제 성매매…악몽이 된 코리안 드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 5월 10일 8시 뉴스에 보도된 필리핀 기지촌 여성 A 씨는 비명을 지른 많은 이들 중 하나입니다. 업주의 강요, 상습 성추행 등으로 성매매에 내몰린 외국인 여성들의 피해가 계속되면서 이 문제는 국제화됐습니다. 국제사회는 E-6-2 비자를 받고 들어온 여성들에게 2012년까지 에이즈 검사를 실시한 한국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외국에서 유입된 여성 노동자들의 불법적 성매매를 한국 정부가 알면서도 방조하고, 은밀히 관리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습니다. UN은 '인신매매 위험국'이라는 강한 단어까지 써가며 우리 정부의 행태를 지적했습니다. 1950년부터 90년대 초에 이르는 동안 한국 정부가 자국민 여성들에게 행했던 '기지촌 관리 정책'은 국제 경제체제의 사슬고리 속에서 은밀한 '글로벌 외주화'의 형태로 이어진 셈입니다.
성매매 부치긴 '연예인 비자'수년간 이어지는 비판에 법무부는 2017년 비자 검증 강화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기지촌에 드리운 과거의 그림자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미군 감축, 부대 이전 등으로 기지촌의 유흥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군인의 사기는 여성으로 진작한다'는 오래된 습속을 바탕으로 예전 기지촌의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2019년 5월, 기자가 직접 방문한 기지촌엔 공연을 위한 무대는 없었고, 대다수의 필리핀 여성들은 스킨십을 동반해 술을 판매하는 일명 '쥬시걸'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은 여전히 성매매로 유입되는 통로가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 필리핀 여성 A의 싸움을 기록하는 이유

"알고 온 것 아니냐? 그럼 돌아가지 그랬냐?"

강제 성매매를 당한 뒤 '선량한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추방 명령을 받은 A 씨가 '나는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냈을 때 주변의 한국인들로부터 돌아와 꽂힌 말들은 비슷했습니다. '억울하면 집에 가지 그랬냐'는 겁니다. 업주의 강압, 계속되는 강제 성추행,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뺏긴 상황 등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기지촌에서 A는 선택권을 뺏긴 채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였으나, 그가 기지촌을 나와 입을 열었을 때, A에겐 다시 '자유계약 능력이 있는 성인'이라는 옷이 강제로 입혀졌습니다. '외국인', '여성 노동자'라는 사회적 맥락이 모두 제거된 피해자 A는 양지에서 다시 '성매매 여성'이 됐습니다.

인권 변호사 단체의 도움으로 A는 국가소송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공인한 E-6-2 비자 제도를 통해 들어왔지만, 성매매를 당한 뒤 보호소로 추방됐고, 구금된 상태에서 영장도 없이 강제 조사를 받은 것에 대해 우리 정부의 책임을 물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 성매매 피해 여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맨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싸워야 합니다. 설령 이 싸움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A가 '배상'의 형태로 받을 수 있는 돈은 '한국인 기지촌 위안부 소송'에 비춰봤을 때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내게 있던 자유를 되찾고 싶습니다. 나에게도 말할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저 정의를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한 이유에 대해 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 자유, 말할 권리. 보통 사람에게 인정되는 당연한 것들을 뺏긴 것에 대한 억울함. A의 소송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하나의 인정 투쟁입니다.

'필리핀' 국적의 외부인이 '우리나라' 정부에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 어떤 독자나 시청자들에겐 불편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불편한 싸움'을 기록하는 건, 이를 살펴보는 게 우리 공동체에 하나의 긍정적 성찰 과정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입니다. 김정자를 비롯한 기지촌 여성들이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이젠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행사된 권력의 부조리함을 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참고문헌
박정미, 2015, 한국 기지촌 성매매 정책의 역사사회학, 1953-1995년 : 냉전기 생명정치, 예외상태 그리고 주권의 역설, 한국사회학 49
이나영, 2007, 금지주의와 국가규제 성매매 제도의 착종에 관한 연구 –남한의 미군정기 성매매 정책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75권
김정자, 2013,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 미군 위안부 기지촌여성 최초의 증언록, 한울   

▶ [기지촌의 사회학②] '기지촌 필리핀 여성'과 '인신매매'의 상관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