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둘째 딸 안미생이 김 구 주석의 맏아들 김 인과 결혼했습니다. 사돈지간인겁니다. 안정근 선생은 25살이던 1910년 3월 10일 '국권이 회복된 조국에 묻어달라'는 형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막내 동생 공근과 함께 형이 수감된 뤼순으로 향합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3월 26일, 형의 유해를 거두기 위해 감옥으로 달려가지만, 일제는 안 의사의 유해를 내주지 않습니다. 안 의사의 묘가 항일운동의 성지가 되는게 두려웠기 때문이죠. 당시 감옥법 74조를 어기고 형의 유해를 내주지 않는 일제의 만행에 울부짓던 그날의 참담한 기억이 안정근 선생의 일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엔 가족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큰 역할을 하죠. 상하이와 간도 지역을 오가던 안 선생은 독립운동 선전활동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합니다. 장모님 왕재덕 여사의 도움도 많이 받아 당시 독립운동하는 사람치고 안 선생 신세를 지지 않은 인물이 드물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1926년 무렵부터 안정근 선생은 뇌질환을 앓게 됩니다. 베이징에서 웨이하이로 거처를 옮긴 건 이 때문입니다. 10년간의 웨이하이 생활을 마친 안 선 생은 1935년 난징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동선을 같이 합니다. 일제의 난징 공습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고, 홍콩, 베트남 하노이를 거쳐 1942년 충칭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하지만, 1949년 상하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안 선생에겐 일제 시대 독립운동 공로로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웨이하이는 안정근 선생이 베이징에서 뇌질환을 앓고 난 뒤 이동해서 10년을 거주한 곳입니다. 평생 중국 전역을 휘젓고 다녔던 안 선생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기간 체류한 곳이죠. 그럼에도 안정근 선생의 웨이하이에서의 행적은 알려진 게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 선생이 웨이하이에서 거주했던 주거지 터를 발견하고, 그 터에 표지석을 세운 것은 의미가 큽니다. 이 의미있는 결과엔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에 헌신하고 있는 김월배 교수와 함께 한 중국인 역사학자의 집념과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일전쟁 연구가인 쑨젠쥔(孫建軍)씨가 그 장본인입니다.
이 보고서엔 안정근 선생이 웨이하이시에서 '대동공사'라는 전보회사에서 근무했고, 김 구 주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방문하는 등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음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안 선생의 거주지인 롄허리 11호는 도로 명칭이 여러차례 바뀌어 현 위치를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직접 찾아다니며 탐문할 수 밖에 없었는데, 현지 노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고, 옛 사진들을 일일이 비교한 결과 롄허리 11호의 위치가 현 젠셔지에 101호 앞이란 사실을 확정했습니다.
웨이하이시 왕루밍 서기가 작년 12월 좌담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안정근 선생 거주지 비석 설치를 건의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안중근 의사와 그 가족의 독립운동 행적을 상세히 설명하고 표지석 설치 설득에 나선겁니다. 결국 두 사람의 간절한 노력의 결과로 왕루밍 서기는 표지석 설치를 허락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의 당위성을 공감하고, 유해 발굴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만큼,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도 결국은 우리가 얼마만큼 잘 준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취재파일 -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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