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사람'들과 '함께'할 때 가능해지는 일

박종환 | CJENM 뮤지컬 홍보 담당자. 걷기 모임 <같이 걸을까> 운영 중

SBS뉴스

작성 2019.05.18 11:01 수정 2019.05.20 09:5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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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에는 '앙상블'이라는 이름의 배우들이 있다. 프랑스어 앙상블(ensemble)의 어원은 라틴어 시물(simul), 곧 '같이, 동시에'라는 의미에서 시작됐다. 10명에서 30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똑같이 '앙상블'이라 불린다. 그들은 고작 하나의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지만, 앙상블 없는 대형 뮤지컬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그 존재감이 크다.

무명 뮤지컬 배우가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린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앙상블의 존재가 가장 빛나는 작품 중 하나다. 탭을 추는 앙상블들의 척척 들어맞는 다리가 보이는 이 작품의 오프닝 장면에서 난 자주 울컥하곤 한다.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옆에서 지켜봐 온, 무명 배우들의 피땀 어린 지난 4~5개월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탭의 현란한 박자와 리듬에 칼군무까지 더해지니, 수십 명의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탭 군무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너나없이 이 작품의 주인공을 '앙상블'이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사실 뮤지컬은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뿐 아니라, 공연장 안과 밖 곳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수십 명의 수고와 땀이 있어야 가능하다. 단 150분 공연을 위해서 동시에 움직이는 인원이 80명에서 100여 명에 이른다. 매일매일이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라이브 공연이기 때문에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하모니가 매우 중요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이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참 아름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살면서 혼자는 어렵지만 '함께'할 때 가능해지는 일들이 있다. 지금 내게는 '걷기'가 그런 일이다. 나는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100일 동안 8000보 걷기에 도전했고, 새로운 100일 동안은 300보를 더 얹어 매일 8300보를 걷고 있다. 꾸준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게 필요한 건 러닝화도, 공원도, 시간도 아닌 '사람'이었다. '함께 걸을 사람들'.

그래서 같이 걸을 사람들을 찾았고 현재 19명이 함께 걷고 있다. 가장 먼저 10년지기 인생친구인 공연기획자 C씨와 의기투합한 후, 주변에서 희망자를 모집했다. 최근 만난 반려견과 걷고 싶다는 공연기획자 K씨, 아침 걷기를 시작한 푸드테크 스타트업 대표 A씨, 차량이동이 많아 걷기에 도전한 아나운서 Y씨, 육아 후 부족한 걸음을 채우는 회사원 L씨, 걸으며 명상하는 요가명상 강사 S씨, 매일 1만 보를 척척 채우는 공예작가 B씨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회비 1만 원씩을 내고 100일을 '함께' 각자 걷는다. 각자가 정한 걸음 수를 채우지 못한 날은 회비에서 1000원이 벌금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100일 후 다시 되돌려 받는다. 벌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우리는 그 벌금을 밑천 삼아 트레킹을 갈 계획이다.

우리는 매일 밤 12시 전후로 걸음 수 인증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한다. 19명이 북적북적거리며 각자 하루 목표 정산을 한다. 그럴 때면 묻지 않아도 하루에 대한 단상들이 덧붙여진다. 종일 회의와 업무로 자리에서 일어날 틈도 없었다는 하소연, 출장이나 행사로 목표의 2~3배 걸은 피곤함, 주말만 되면 걸음 수가 현저히 떨어지는 나른함, 회식자리에서 잠시 나와 걷고 있다는 간절함까지 차곡차곡 쌓인다.

사실 나는 이 맛에 하루를 걷는 것 같다. 혼자 했다면 금세 포기했을 날에도 제자리걸음을 할지언정 숫자를 채우게 만드는 힘이다. 무언의 강박증도 '함께'이기 때문에 즐겁다. 나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나누며 마음 따뜻해지는 그 순간들이 참 좋다.

'함께' 공통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빈틈을 내어주는 일 같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고 서툴러도 기다려주고 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빈틈은 꽉 메워지고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굳이 빈틈을 숨길 필요도 없고, 빈틈의 크기도 상관없다.

각자의 역할들이 직장이나 가정, 사회에서 앙상블을 이루며 온전히 움직이듯이, 각자가 모여 '함께'의 가치를 생각할 때 우리 삶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찾고 참여할 예정이다. 그때마다 쌓이는 소소한 행복들이 내 삶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끌어줄 것이다.

오늘 S씨는 걸으면서 듣기 좋은 음악을 골라줬다. 아이와 보낸 B씨의 따뜻한 휴일도 들여다봤다. 여행 중인 C씨는 일찌감치 목표 걸음 수를 채웠다고 알려왔고, E씨는 야식 사진과 함께 자신만의 레시피도 공유해줬다. 그저 길 위를 걷자고 모였는데, 서로의 인생을 함께 걷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오늘도 잘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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