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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김창규 │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인-잇]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결국 꼰대' 1편: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새벽 5시 30분. 자명종 소리가 천근만근 무거운 내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좀 더 자자는 저 마음속의 유혹을 확 쫓아냈다. 나는 부랴부랴 이를 닦고 세수하고 얼른 옷을 챙겨 입고 회사로 향했다.

2월 초. 새벽 차가운 바람. 음산한 기운. 출근 시간 1시간 50분 소요. 마음이 심란해 왔다. 새벽같이 밥도 못 먹고 먼 거리를 나서야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전 팀에서 꼰대 같은 팀장과 관계가 좋지 않아 본사에서 지점으로 강제 전출된 지 그날이 딱 1년째 되는 날이어서 그렇다. 1주년의 의미, 그것이 가슴을 무지하게 휑하게 만들었다.

1년 2개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팀장이 새로 왔었다. 고참 부장이었다. 그는 임원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이루고자 그런지 부임하자마자 우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단 기존에 우리가 일하던 방식을 모두 다 부정했다. "누가 이렇게 하라 했냐? 왜 너희 맘대로 결정하냐? 보고서가 뭐 이따위야"부터 "퇴근을 벌써 하냐? 쓸데없이 전화 통화 길게 하지 마라. 옷 좀 잘 입고 다녀라"까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까지 다 간섭했다.

왜 그런지는 뻔했다. 자기에게 맞추라는 거였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업무 처리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면 팀원 개개인의 능력이 더 잘 발휘되고 그 결과 팀 성과가 올라간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당시 우리 팀원들은 그를 로마신화에 나오는 악당 '프로크루스테스'라고 불렀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 철 침대에 눕혀 놓고 행인이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짧으면 다리를 늘려 죽였다는 일화의 주인공이다. 새로 온 팀장은 권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했다.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팀 내 선임인 나도 그런데 후배 팀원들은 오죽했으랴. 서로 간의 대화는 없어지고 얼굴이 어두워졌으며 항상 죄인처럼 주눅이 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회의에서 경영층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는지 뭔지 그는 평소 마뜩잖게 여겼던 나한테 그날 유난히 더 짜증을 심히 냈다.

"김 차장. 당신이 내가 오기 전에 사용했던 이 법인카드 내역 뭐야? 약국에서 약 사는 것까지 법인카드 쓰나?" 팀장은 조용하게 말을 했지만, 목소리에는 칼날이 서려 있었다.
"예?" 난 그것이 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당황했다. 그러자 팀장은 한 건 잡았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협박 아닌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아! 생각이 났다.

"그거 제가 쓴 거 아닙니다."
"뭐라고?"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요, 당시 전 팀장이 갑자기 아프셔서 뭐 대리에게 병원에 모시고 가 하면서 택시비 하라고 제 카드를 주었는데 아마 그때 그 친구가 약까지 이 카드로 결제한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팀장에겐 너무 성급했구나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사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말인가 똥인가.
"왜 법인카드를 남에게 주나? 어쨌든 당신 거잖아. 규정 외로 사용했으니 당신 책임이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욱하는 감정은 이성을 속히 베어버렸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이 한마디로 인해 그 사건 이후 두 달 뒤 나는 본사 핵심부서에서 경기도 끝에 있는 지점의 평사원으로 전출되었다.

그렇게 쫓겨났고 처음엔 억울, 창피, 걱정의 마음으로 현장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좀 지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물론 돌아이 보존의 법칙이 여기도 적용되어 윗사람 때문에 순간순간 힘든 날도 있었지만 나를 유배시킨 팀장만한 꼰대는 없어서 견딜 만했다. 어쨌든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일단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나 본사에서 있을 때 왜 현장 사람들이 본사 정책에 대해 혹은 본사 직원들에 대해 반골적 태도를 취했는지 이젠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본사가 프로크루스테스였던 것이다. 또한 유배 기간 동안 강제된 성찰은 나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생의 시련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내 기준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님을 알았고 내 잘남이 내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겸손해졌다는 얘기다.

그날도 이런 생각을 하며 출근하다 보니 1시간 50분이 훌쩍 지나간 것 같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나는 "안녕하세요"하며 반갑게 동료들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어, 그런데 양 사원의 얼굴이 뾰로통했다. 얼마 지나지 않자 양 사원은 나한테 와서 푸념을 해대기 시작했다.

"차장님, 정말 너무 싫어요."
"하하, 뭐가요?"
"우리 지점장님 말이에요."
"왜요? 우리 지점장님 정도면 양반인데…"
"미안하다면서 왜 자꾸 미안한 일을 시키는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미안하다고나 하지 말든지. 맨날 미안하다면서 짜증 나는 일을 계속 시키잖아요. 위선쟁이."
"하하." 무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웃어요?" 하며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세대가 다르긴 다르군. 미안하다는 말이 누구를 짜증나게 하는 줄은 몰랐네. 직원에게 일을 시키면서 "미안하지만" 이런 단어를 쓰는 지점장은 거의 없지. 나도 이날 이때까지 그런 분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요즘 애들은 이런 정중한 말투를 쓰는 상사도 착한 가면을 쓴 꼰대라고 생각하나 보군.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서 계속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니까. 하하. 미안하면 안 시켜야 하는군. 아이고 윗사람 노릇 힘들다.'

이때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인사발령이 났다고 한다. 난 순간 긴장했다. 혹시 더 나쁜 쪽으로 가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말이다.

- 다음 편에 계속 -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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