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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미선 재판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취재파일] 이미선 재판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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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A 신문이 사회적 파장이 큰 특종을 보도했습니다. 얼마 뒤 보도에 참여했던 여러 기자 중 연차가 낮아서 결정권은 없었지만 취재에는 관여한 기자 한 명이 외부 학술지에 해당 기사에 대해 연구한 결과라면서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기고했습니다. 기자는 기사의 내용과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대상 보도의 의의"라며 "(비판 대상이 된) 공직자의 인권과 국민의 알 권리의 조화를 도모한 보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글을 끝맺었습니다.

얼마 뒤 이 보도에 대한 충격적 사실이 폭로됐습니다. A 신문사 경영기획실에서 작성한 비밀 문건이 공개됐는데, 이 보도를 "정부 운영에 A 신문사가 협조한" 대표 사례로 꼽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도거래'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당 보도의 관점과 논리 전개가 대단히 무리하다는 학계의 비판이 이어져 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한 독자가 기자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왜 외부 학술지에 당신의 이름을 걸고 기고한 글에서 문제의 보도를 옹호했나요?'

이 기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해당 보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옹호한 적이 없다.'라고 답하진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사례는 어떨까요?
법원 재판-법정, 판사
● 그 판사는 왜 판결을 옹호했을까?

2013년 12월 대법원은 사회적 파장이 큰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얼마 뒤 재판 과정에 참여했던 판사 중 대법관은 아니어서 결정권은 없었지만 사건 검토에는 관여한 판사 한 명이 외부 학술지에 해당 판결에 대해 연구한 결과라면서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기고했습니다. 판사는 판결의 내용과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대상 판결의 의의"라며 "법적 안정성과 근로기준법의 강행 규정성의 조화를 도모한 판결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글을 끝맺었습니다.

얼마 뒤 이 판결에 대한 충격적 사실이 폭로됐습니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비밀 문건이 공개됐는데, 이 판결을 "정부 운영에 사법부가 협조한" 대표 사례로 꼽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당 판결(중 핵심 부분 중 하나)의 관점과 논리 전개가 대단히 무리하다는 학계의 비판이 이어져 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판사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왜 외부 학술지에 당신의 이름을 걸고 기고한 글에서 문제의 판결을 옹호했나요?'

첫 번째 사례는 가상의 상황일 뿐이지만, 두 번째 사례는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첫 번째 상황에서 해당 기자가 보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거나, 옹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상황인 두 번째 경우에서도 해당 판사가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거나, 옹호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사례에 등장하는 판사는 지난 4월 18일 정식으로 임명된 이미선 헌법재판관입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2013년 12월 대법원이 선고한 통상임금 사건의 검토 과정에 재판연구관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판결에서 특히 논란이 됐던 부분은 이른바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 우선 논리'입니다.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노사협약은 근로기준법에 위반되지만, (제한된 상황에서는) 노사 간의 신의성실의 원칙을 근로기준법의 강행 규정성을 준수하는 것보다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에, 위법한 노사협약의 효력도 인정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2014년 서울대 금융법센터가 발간하는 학술지 [BFL]의 "판례연구"라는 코너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고한 통상임금 판결에 대한 글에서 "대상판결의 의의"라며 신의칙 우선 논리와 관련해 "법적 안정성과 근로기준법의 강행 규정성의 조화를 도모한 판결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논리에 대해서는 학계에 비판이 이어져 왔고, 2018년에는 법원행정처가 이 판결, 특히 신의칙 우선 논리와 관련해 "정부 운영에 사법부가 협조한 사례"로 내세웠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판거래' 의혹도 불거졌습니다.

통상임금 판결을 옹호한 것 자체를 문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것과 별개로, 법률가로서 자신의 소신에 따라 이 판결의 논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재판관이 되려는 사람은 판결을 옹호한 이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며칠간 여러 차례 질문을 던진 끝에 겨우 듣게 된 이 후보자의 대답은 "옹호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후보자는 "언론에 언급된 논문은 검토연구관 입장에서 해당 판례의 배경, 의의에 대한 소개, 설명을 한 것"이지 옹호하거나 긍정적 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법원 (사진=연합뉴스)
● "옹호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군색함

앞서 말했듯이 이미선 재판관의 이 대답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글에서 "대상 판결의 의의"를 "~라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썼다면, 이 문장은 이름을 스스로 밝힌 필자 자신의 '가치 평가'라고 글을 읽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개적 지면에 글을 남긴 필자가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공적 책임이기도 합니다. "대상판결의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라고 말한 이미선 재판관이 이 대목을 판결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거나,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대법원 판례에 대해 외부에 발표하는 글은 주관적 가치 평가 없이 판결의 내용과 뜻만을 단순해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이 재판관을 옹호합니다. 하지만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외부에 쓴 판례 평석 형식의 글에서 대상 판결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상 판결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는 경우까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치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대법원에 소속된 재판연구관으로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라는 주장도 부적절합니다. 헌법재판관이라는 중요한 공직의 후보자로 나선 사람에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썼던 글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자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법농단 의혹이 논란이 됐을 때 헌법재판관보다 공적 책임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볼 수 있는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내부용으로만 작성한 문건에 대해서도, 많은 법관과 국민은 '관행'이라는 변명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법원 재판-정의의 여신상
● 이미선 재판관이 '말한 것'보다 더 큰 문제: '말하지 않은 것'

'재판거래 의혹 판결 옹호'는 이미선 재판관의 주장과 달리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말한 것'에 분명히 해당합니다. 이미선 재판관이 그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미선 재판관이 말한 것은 지금부터 살펴볼 문제에 비하면 작은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미선 재판관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선 재판관이 '재판거래 의혹' 판결인 통상임금 판결을 옹호한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가장 궁금한 것은 이 후보자가 2014년 당시에 이런 글을 쓴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신분이었던 이미선 재판관이, 국민에게 자신의 소신과 법적 견해를 반드시 밝혀야 했던 2019년 4월이라는 시점에, 이 판결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미선 재판관은 이 같은 질문에 "확정된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재판관의 답변은 저에게 존재론적인 고민을 안겼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률적 사건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판결이 확정된 사건일 것입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확정된 판결에 대해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판결이 확정되지도 않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는 것은 더욱 부적절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이 세상의 모든 법률적 사건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논리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헌법의 최종해석자인 헌법재판관이 되려는 사람에게 어떠한 법률적 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어서도 안 된다는 부조리한 상황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미선 재판관은 현직 판사인 송승용 부장판사의 공개 해명 요구도 사실상 거부했습니다. 2013년 통상임금 판결에 나오는 문제의 신의칙 우선 논리는 "(그 사건의 검토연구관이었던) 후보자 개인의 의견은 아니었다."라고 말했지만, 막상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된 2019년의 시점에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2013년이나 2014년이 아니라 2019년 현재, 헌법재판관 후보자 신분으로서 이 판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재판관 후보자 입장에서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의 입법목적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아예 입장을 밝히지 않은 처음보다는 진전된 답변이었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끝내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 군 동성애도, 난민도, 5.18 폄훼 행위도…말하지 않은 이 재판관

이미선 재판관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4월 10일 인사청문회에서 이미선 후보자는 '군 동성애 금지 문제'에 대해서 "제가 진지하게 법적 검토를 한 적은 없다."라고 답했고,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도 "그 부분은 좀 진지하게 생각을 못 해봤다."라고 밝혔습니다. 최저임금제, 종교인 과세, 5.18 폄훼 행위에 대한 사전 질문에도 "답변 유보"로 대응했습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헌법재판관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공직자 중 아마도 가장 막강한 권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일 것입니다. 헌법재판관들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기각한 적이 있고, 다른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받아들여 파면한 적이 있습니다. 헌법재판관들은 수도 이전을 막아 세웠고, 간통죄를 폐지했으며, 낙태죄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국민들로부터 단 한 표도 받은 적이 없는 헌법재판관들이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헌법재판관 임명 과정의 민주적 정당성은 헌법재판관과 헌법재판소 제도의 근간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민주적 정당성은 선출된 공직인 대통령 등의 지명을 통해서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재판관 후보자 본인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입장을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밝히고, 국민이 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달성됩니다. 국민 앞에 자신의 법률적 견해를 소상히 밝히고, 그 견해가 적어도 많은 국민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은 사람이 민주적 정당성을 제대로 갖춘 헌법재판관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선 후보자의 법률적 견해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이미선 재판관은 말한 것에 대한 책임은 피하고, 정작 말해야 할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은 채로 헌법재판관에 임명됐습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 (사진=연합뉴스)
● 말하지 않은 채 임명된 이 재판관…행운을 기대한다

앞으로 6년 동안 이미선 재판관은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형제를 유지할지 폐지할지 말하게 될 것이고, 국가보안법과 군 동성애 금지 조항에 대해서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다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헌법적 사안이 이미선 재판관의 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선 재판관의 말에는 법률과 세상을 바꿀 권능이 부여될 것입니다.

'서울대를 나온 판사 출신 남성'이라는 관행을 깨고 임명됐던 변호사 출신 여성 법조인 박보영 전 대법관이 퇴임할 때, 헤럴드경제 좌영길 기자는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가 주심을 맡았던 쌍용차 해고 사건 노동자와 가족 중 25명은 이미 자살이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박 대법관에게 ‘왜 이렇게 판결했느냐’ 따지는 것은 지엽적이이고 소모적이다. 그보다 ‘왜 우리는 변호사 박보영을 대법관에 앉혔나’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우리가 성의없이 골랐을 뿐이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의 말이 앞으로 국민 대다수를 이롭게 한다면 대단한 행운일 것입니다. 하지만 혹여라도 그러지 못하다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책임을 묻지 못한 이미선 재판관의 임명 과정은 두고두고 큰 후회로 돌아올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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