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판 지저분해진다"…북한이 폼페이오 교체 요구한 이유?

손석민 기자 hermes@sbs.co.kr

작성 2019.04.19 10:28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월드리포트] "판 지저분해진다"…북한이 폼페이오 교체 요구한 이유?
북한이 1,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북미 협상을 지휘해 온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교체를 요구했다. 북한이 협상 상대를 특정해 교체 요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이 그동안 미국의 협상 방식과 나아가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4차례나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도 얼굴을 맞대온 인사를 저격한 것은 이례적이다.

● "저질적인 폼페이오만 끼어들면 일이 꼬인다"

북한의 폼페이오 교체 요구는 지난 1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제기됐다. 권정근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이 기자와의 문답을 통해 "하노이 수뇌회담의 교훈에 비춰봐도 일이 될 만하다가도 폼페이오만 끼어들면 일이 꼬이고 결과물이 날아나군(날아가고) 하는데 앞으로도 내가 우려하는 것은 폼페이오가 회담에 관여하면 또 판이 지저분해지고 일이 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미국과의 대화가 재개되는 경우에도 나는 폼페이오가 아닌 우리와의 의사소통이 보다 원만하고 원숙한 인물이 우리의 대화 상대로 나서기 바랄 뿐"이라고 교체를 요구했다.

권 국장은 교체 요구 이유에 대해선 김 위원장의 시정 연설을 끌어들였다. 권 국장은 "미국이 올해 말 전에 계산법을 바꾸고 화답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으로 만 사람이 명백히 이해하고 있는 때에 폼페이오만이 혼자 연말까지 미조(미북) 사이의 실무협상을 끝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여 사람들의 조소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빅딜이라는 미국의 비핵화 방식을 바꾸라고 했는데, 폼페이오가 그걸 고작 실무협상을 잘해보자는 말로 축소시켰다는 취지다.

이렇게 폼페이오 장관의 의사소통 방식과 메시지를 문제 삼은 것 같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최고존엄인 김 위원장과 직결돼 있다. 권 국장은 "지난주에 있은 국회 청문회들에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모독하는 망발을 줴침으로써(지껄이면서) 자기의 저질적인 인간됨을 스스로 드러내고 리성적인 사람들의 경악을 자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9일 상원 세출위원회에 출석해 '김정은에 대해서도 베네수엘라 대통령처럼 독재자라는 표현을 쓰겠느냐'는 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내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며 "물론이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에 대한 모독은 북한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에 , 그를 독재자로 지칭한 사람과 상종할 수 없다는 북한식 어법인 셈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애증의 관계…지난해 연말 "낯가죽 두텁다" 비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사실상 해고된 틸러슨 장관 후임으로 지난해 4월 취임했다. 직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재직 시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하며 대북 관련 정책을 논의해왔다. 국장 시절 북한 정권 교체론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매파로 분류됐지만 취임 후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고, 이후 싱가포르 정상회담 등을 통해 대북 협상을 전면에서 이끌어왔다.

폼페이오는 중앙정보국장으로 1차례, 그리고 국무장관으로 3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그 가운데 3번이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고 정상 간 친서를 주고받는 일도 폼페이오를 통해서였다. 그렇게 각별해 보이던 폼페이오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지난해 7월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한 달 뒤 북한을 찾았던 폼페이오에게 북한은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나왔다"고 비난했다. 이에 폼페이오도 "우리의 요구가 강도 같은 것이라면 (유엔 제재에 참여한) 전 세계가 강도"라고 맞받아친 바 있다.

연말 들어서는 비난의 수위가 더 노골화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2월 13일 "우리와의 협상탁에 온화한 표정으로 앉았던 고위 인물이 제집에 돌아가서는 불량국가니 최대의 압박이니 하고 실컷 험담해대고서는 다음번에 또 와서 천연스럽게 히죽거리며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면 낯가죽이 두터워도 여간 두텁지 않다"고 폼페이오를 익명으로 질타했다.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에는 최선희 부상이 나서 "폼페이오와 볼턴이 기존의 적대감과 불신의 감정으로 두 정상의 건설적인 협상 노력에 장애를 조성했다"고 회담 결렬의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협상판 바꾸려 메신저 저격?…미국의 선택은?

통상 협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협상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메신저'를 공격해 '메시지'를 손상시키는 전략도 같은 맥락이다. 김 위원장이 연말이라는 시점을 제시함에 따라 북한으로선 그때까지 비핵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김 위원장 모독을 이유로 상대 장수 교체를 요구함으로써 체면도 살리고 협상판을 새로 짜맞춰 보자는 의도를 내비친 걸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선뜻 폼페이오 교체를 받아줄 리는 만무하다. 의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마당에 비핵화 일괄타결, 대북 경제 제재 유지라는 정책을 당장 바꿀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다. 폼페이오의 거취를 둘러싼 북미 간 신경전이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이 정치적 출구 전략을 마련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의 최대 관심사는 내년 대선 승리이고, 폼페이오의 정치 시계는 2024년 대선에 맞춰져 있다는 게 워싱턴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폼페이오가 내년에, 자신이 하원 의원을 지낸 캔자스주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하고 이를 발판으로 대선 도전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도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이런 설들에 대해 폼페이오는 정면으로 부인하지 않은 채 지난해 연말부터 캔자스 언론과 접촉면을 넓히고 있다. 국무장관 교체가 북미 협상에 핵심이 될 수는 없지만, 내년 대선 승리가 최대 목표인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북미 간 새 판짜기가 재선에 도움이 된다면 뽑아 들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