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출신 떠나 오직 '독립' 위해…광복군의 발자취

정성엽 기자 jsy@sbs.co.kr

작성 2019.04.11 21:36 수정 2019.04.11 22:0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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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욱 기자>

상하이에서 태동한 임시정부는 마지막 거점인 충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 정점은 임정 직할 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일입니다.

조국 독립을 직접 쟁취하기 위한 항일 무력 투쟁의 역사를 정성엽 특파원이 따라가 봤습니다.

<정성엽 기자>

청산리 대첩으로 위용을 떨친 만주 항일 독립군은 일제의 간도 보복 학살과 러시아의 배신으로 투쟁 기반을 잃었습니다.

정처 없는 피란 길에 새로운 부대 창설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화 '암살' :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무장 독립군 복원에 먼저 나선 것은 일제 요인 암살로 이름을 떨친 약산 김원봉입니다.

의열단원을 주축으로 조선의용대를 결성했습니다.

[한시준/단국대 사학과 교수 : 당시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계열이고, 조선의용대는 좌익 계열이 세운 건데, 제일 처음으로 무장조직을 창설한 것이 조선의용대입니다.]

마침내 1940년 9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만주지역을 호령하던 이청천과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임정 직할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처음 30명 정도로 시작했던 광복군에 무정부주의 성향의 대원들과 사회주의 계열이던 김원봉도 조선의용대 일부를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김준엽, 장준하 같은 학도병들도 일본군을 탈출해 해발 3,000m 산을 넘는 목숨을 건 행군으로 충칭에 도착했습니다.

[모위엔이/충칭 임시정부청사 관장 : 당시 국민당 정부 통계에 따르면 (광복군이) 1천 명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이념과 출신을 떠나 모인 광복군은 충칭과 시안, 푸양 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특히 일제에 점령되지 않은 시안에서 실질적인 힘을 키워갔습니다.

시안시 외곽 두취진에 조성되어있는 이 기념공원은 이곳이 한국광복군 중 가장 병력이 많았던 2지대가 주둔해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오성린/광복군 후손 : (부모님이 누구십니까?) 한국광복군. 광복군은 170여 명이 있었고, 가족을 포함하면 200명 정도 됐습니다.]

[왕메이/시안박물관 부관장 : 그분들이 이 근처에 흩어져 살았는데, 마을에 살거나 동굴집 또는 주변 사찰에서 살았습니다.]

시안 주둔 대원들은 국내 침투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중난산 자락에 대원들의 숙소로 쓰였던 오래된 절을 지나서 이렇게 수백 미터를 올라와 보니 이렇게 깎아지른 절벽에 움푹 파인 평지가 보입니다. 이곳이 당시에 광복군이 비밀훈련을 했던 곳입니다.

광복군 대원들은 조국 광복 의지를 불태우며 2차대전 연합군 자격으로 국내 진입을 노렸지만,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기회를 잡지 못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만주 독립군의 항일 정신을 이어 임정 27년의 역량이 집결된 한국광복군.

자력 해방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은 역사에 남았습니다.

(영상취재 : 이국진, 영상편집 : 박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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