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에서 집까지 오는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 '올레'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전국에 걷기 여행 열풍을 일으킨 '제주 올레'가 일본으로 처음 수출된 게 2012년이다. 일본 남단 규슈 지역에 '규슈 올레'가 생긴 것이다. 최근 후쿠오카 현 신구 마을에 22번째 규슈 올레 코스가 생겨서 개장 행사 취재차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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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올레는 제주 올레의 자매길이다. 새 코스를 개척하고 결정하는 심사와 자문을 제주 올레에 맡겼고, 제주 올레의 안내 표지나 상징물 같은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왔다. 규슈 올레는 이 대가로 매년 제주 올레에 자문료를 내고 있다. 규슈 올레 초기인 2013년에도 취재를 다녀왔는데, 6년 만에 다시 가니 규슈 올레의 커진 '존재감'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번 코스를 낸 신구 마을은 관광객 유치와 지역 개발 격차 완화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코스를 개발했다. 신구 오모테나시 협회(관광협회에 해당하는 조직. '오모테나시'는 '환대'라는 뜻이다)의 올레 준비실장 이케다 데페이 씨는 몇 달 동안 길이 없는 곳에는 길을 새로 내고, 오래된 길은 새로 정비하면서 올레 코스를 개척했다. 동부 산간지역에서 시작해서 걷다 보면 도심을 관통해 해변을 지나 역에서 끝나는 길이다.
"신구 지역은 특별히 유명한 관광자원은 없는데, 작은 명소들을 모아서 올레 코스로 완결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지역은 중심부는 발달했는데, 동부 산간지는 낙후되어 있고 인구도 점점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올레를 통해 동쪽에서 서쪽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해변이 올레 코스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도심에서 끝나는 코스였지만, 제주 올레의 자문을 받아 소나무 숲과 해변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추가했다. 몇 달 동안 코스를 정비하고, 다른 지역과 경쟁을 거쳐 올해의 신규 코스로 선정됐을 때 담당 직원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코스는 온천을 비롯한 뚜렷한 관광자원이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크게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무엇보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접근성이 좋다는 게 큰 장점이다.
신구 코스가 개장한 날, 무려 천 명이 모여들어 함께 걸었다. '올레 완주자 클럽' 배너를 달거나 각 코스 기념배지를 주렁주렁 배낭에 장식한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코스 곳곳에 지역 주민들이 나와서 지역 특산물로 만든 음식을 대접했다. 막걸리와 비슷한 '감주', 이 지역 특산 딸기로 만든 크레페, 고로케 등을 맛볼 수 있었다. 올레에 이 지역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구 코스 개장을 취재한 다음날, 기존 코스 중 한 곳을 돌아보는 일정이 있었다. 사가 현에 있는 우레시노 코스였다. 원래는 신구 코스 취재가 주가 되고, 우레시노 코스는 보조 일정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변수가 생겼다. 카메라 기자가 좋은 화면을 확보하기 위해 드론 촬영을 준비했는데, 신구 코스에서는 드론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공항 근처라서 드론을 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레시노 코스에서는 드론 촬영이 가능했다.
실제로 우레시노 코스를 가보니, 차밭을 지나 편백나무숲, 폭포, 온천으로 이어지는 길의 자연경관이 훌륭했고, 코스 종점에 있는 무료 족욕탕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드론 촬영으로 시원하고 때깔 좋은 화면도 확보할 수 있었다. 취재의 주목적이었던 신 코스보다 기존 코스의 화면이 더 훌륭한 셈이었다. 기사에서 우레시노 코스 분량을 좀 더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레시노 시 관광 담당 공무원과 제주 올레 관계자로부터 우레시노 코스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었다. 우레시노는 인구 2만 6천 명 정도의 작은 온천마을이다. 일본 내에서는 피부에 좋은 '미인 온천', 그리고 녹차와 도자기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우레시노에 올레 코스가 생긴 것은 같은 사가 현의 온천마을인 다케오 올레에 자극을 받은 후라고 한다. 다케오 올레를 걸은 사람들이 많아서 이웃의 우레시노까지 와서 숙박하는 것을 보고, 우레시노에도 올레 코스를 열었다는 것이다.
담당 공무원 시나가와 야스요 씨는 '올레가 우레시노의 3대 근간 산업인 온천, 차, 도자기를 한 번에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콘텐츠라서 다른 관광상품과 차별화된다'고 했다. 우레시노 올레가 생긴 게 2013년이다. 우레시노의 2012년 외국인 관광객은 2만 1천여 명에 불과했지만, 2017년에는 12만여 명으로, 무려 6배 가까이 늘어났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한국인이 70퍼센트를 차지한다. 물론 이게 올레만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지만, 올레를 비롯한 적극적인 관광 진흥책이 큰 성과를 올린 것이고, 특히 올레에 친숙한 한국인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우레시노 코스까지 걷고 나서, 나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우레시노 코스를 앞세워 기사를 썼다. 방송뉴스라서 화면을 중시한 결정이기도 했다. 규슈 올레의 관광객 유치,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우레시노 올레를 먼저 소개했고, 신구 코스 역시 올레의 이런 효과를 기대하고 코스를 개장했다고 썼다. 이어 올레가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고 썼다. 일본 혼슈 섬의 미야기 지역에서도 동북대지진 이후 급감한 관광객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미야기 올레를 개장했고, 몽골 올레도 생겼다. 현재 베트남에서도 올레 코스를 열기 위해 협의 중이다.
규슈 올레를 취재하면서, 올레에 쏟는 일본인들의 정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레 코스 개척과 관리는 대개 지자체 관광과 공무원들이 담당한다. 규슈 올레 홍보를 담당하는 규슈 관광추진기구는 규슈의 각 현에서 예산을 갹출해서 설립한 기관이다. 주민들은 자발적인 봉사활동으로 올레 사업 추진에 기여한다. 민간 비영리 단체가 끌고 가는 제주 올레에 비하면 훨씬 사업 추진 여건이 좋은 편이다. 제주 올레 방문객은 최근 크게 줄었다는데, 규슈 올레는 계속 뜨는 모습이다. 30개 코스를 목표로, 앞으로도 계속 새 코스를 열 계획이다.
한국과 가까운 규슈는 싼 비행기표도 많아서 큰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해외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해 규슈 입국 외국인 511만 명 중에 한국인이 241만 명이었다. 규슈 올레는 제주 올레에 친숙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관광 콘텐츠다. 지금까지 규슈 올레를 걸은 여행객 45만 명 중에 한국인이 60퍼센트 이상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인인데, 일본인들 중에 올레 팬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신구 코스 개장 전 규슈 올레 전 코스를 완주한 일본인이 150여 명이나 된다. (한국인 완주자는 50명이다.)
최근에는 다른 국가 여행객들의 관심도 높아지는 추세다. 규슈 관광추진기구는 영어로 된 규슈 올레 홍보책자와 영문 홈페이지를 준비하고 있다. 신구 코스에서 만난 이탈리아 여행작가 로라 로스는 '코스가 다채로워서 좋고, 안내 표지판이 다른 외국의 걷기 코스보다 굉장히 잘 되어 있다'고 칭찬하면서, 원조인 '제주 올레'에도 꼭 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한일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안 좋다지만, 규슈 올레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규슈 사람들의 환대는 정말 따뜻했다. 규슈 올레에서는 한일 양국 여행자들이 함께 걸으며 친구가 되고 있었다. 사람과 자연 마을을 잇는 '올레'가 경쟁력 있는 문화 관광 콘텐츠로 외국에서도 통한다는 걸 확인했고, 한국에 수업료 내고 배워간 올레로 다시 한국인들을 끌어들이는 일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도 느꼈다. 2013년 출장 때도 실천하지는 못했는데, 이번에는 진짜 일이 아니라 여행으로 다시 올레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진=(사)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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