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4년 전, 그 사건 - ② 제 머리 못 깎는 검찰과 침묵하는 사람들

류란 기자 peacemaker@sbs.co.kr

작성 2019.03.26 16:09 수정 2019.03.27 08:4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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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4년 전, 그 사건 - ② 제 머리 못 깎는 검찰과 침묵하는 사람들
임은정 부장검사가 '중세시대 흑사병마냥 흉흉' 했다던 4년 전 그 소문은, 검찰의 자정 능력에 관한 익숙한 문제 제기-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를 넘어선 질문들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

▶ [취재파일] 4년 전, 그 사건 - ① 에밀 졸라를 인용한 무죄구형 검사

이를테면 '중은 제 머리를 못 깎아놓고선 왜 민머리인 척하는가', '민머리인 척하는 데엔 어떤 합리화와 변명이 동원되는가', '민머리가 아닌 중을 보고 맞다며 맞장구치거나 최소 침묵하는 사람들은 무슨 심산인가', '일련의 난장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학습하는가' 같은. 물론 궁극의 질문은 '뻔히 스스로 못 깎을 것 알면서 왜 남에게 맡길 생각 않는가'가 될 테지만.

●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하마터면 묻힐 뻔했던 그 사건

4년 전, 그 소문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게 된 데엔 서지현 검사의 역할이 컸다. 지난해 1월, TV 뉴스에 출연해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가해 사실을 폭로했던 그날이었다.
[인터뷰] 서지현 검사 "검찰 내 성폭행도 있었지만 비밀리에 덮여" (JTBC 뉴스룸 2018-01-29)

[앵커] 오늘 올리신 글 중에 좀 충격적인 내용이 이걸 옮겨도 될지 모르겠지만 '성추행 사실을 문제 삼는 여검사에게 잘나가는 검사의 발목을 잡는 꽃뱀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자주 봤다', 진짜로 이렇게 들으셨습니까?

[서지현/검사 : 네, 실제 들었습니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성폭행이 있고요. 성폭행은 강간을 의미합니다. 성추행은 강제추행을 의미하고요. 성희롱이라는 것은 언어적인 어떤 성폭력을 얘기합니다. 그렇게 세 가지인데요. 성추행, 성희롱뿐만 아니라 사실은 성폭행도 이루어진 적이 있으나 전부 비밀리에 덮고…]

[앵커] 검찰 내에서요?

[서지현/검사 : 네, 맞습니다.]

[앵커] 성폭행이요? 검사 간에?

[서지현/검사 : 네, 그것은 피해자가 있고 제가 함부로 얘기할 상황은 아니어서요.]

[앵커] 물론 그러시겠죠.

서 검사가 언급한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서 여러 차례 기사가 나왔던, 잘 알려진 구문이었기 때문이다. 뉴스가 마저 끝나기도 전, 같은 자리에 있었던 한 검사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라 말했다. 그를 포함한 검찰 내 누구라도, 서 검사가 말한 사건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2015년 '후배 여검사에 성폭력을 가했다'는 끔찍한 소문만 돌았을 뿐, 어떠한 사실 규명 없이 사직했던 전직 검사 A씨 사건.
법조 명문가 '잘나가던 검사' '돌연 사직'에 루머 급속 확산 (경향신문 2015-5-14)

명문 법조인 집안 출신으로 승승장구해온 공안검사가 돌연 사직한 배경을 놓고 다양한 얘기가 나오고 있다. 소문은 사법연수원 동기들 중 선두권으로 분류돼온 ㄱ검사(38)가 인사철도 아닌데 최근 옷을 벗으면서 시작됐다. ... 검찰 안에서는 부장검사·평검사·여검사 등 그룹별로 여검사 성추행설과 부장검사와의 불화설 등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게 성추행설이라고 한다. 단순 성추행설부터 그보다 심한 성접촉이 있었다는 얘기까지,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소문이 중구난방으로 나오고 있다. 한 검사는 "평검사 회식 중 동료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시도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 루머 양산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나 대검이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으면서 일선 검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소문이 공익법무관들에게까지 퍼졌다"면서 "루머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진상이 무엇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찰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대검은 이틀 뒤, 공식 조사단을 꾸리고 서 검사 사건을 포함한 검찰 내 모든 성폭력 사건을 '전수 조사하겠다' 방침을 들고 나왔다.
검찰, '성추행 조사단' 구성…피해 전수조사도 검토 (SBS 8뉴스 2018-01-31)

대검찰청은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을 구성해 운영한다고 밝혔습니다.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지 이틀 만입니다. ... 서 검사 사건부터 조사할 계획이지만 조사 대상과 기간에는 제한을 두지 않을 방침입니다. 여검사를 비롯한 검찰 내 전체 여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피해 전수조사 방안까지 고려되고 있습니다. ...

조사단의 한계는 그 명칭에 예견돼 있었다.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 성폭력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란 무엇을 의미할까? 최초에 서지현 검사뿐만 아니라, 추가로 드러날 다른 피해자들 역시 가해자의 처벌을 요구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단이 아닌,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조사단을 조직했다. 역대 검찰이 수사 의지를 드러내며 꾸렸던 기구 중 이런 명칭은 없었다. 일각에선 그렇기에 해당 사건들이 '범죄'의 관점에서 다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기우는 아니었다.

●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 "피해자 처벌 의사 확인했다" "핵심 증거자료가 사라졌다"

조사단은 발족(2018.1.31) 직후 서 검사 사건(안 전 국장의 성추행 및 인사 불이익 조치 의혹)과 함께 검찰 내 여타 성범죄 비위에 대한 진상 조사에 착수한다. 걔중 가장 관심을 모았던 사건은 (역시나) 서 검사가 뉴스에서 언급했던 전직 검사 A씨의 사건이었다. 두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야 조사단은 외국에서 연수 중이던 전직 검사 A씨를 소환 조사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데 이른다.
<성추행 조사단, '후배검사 성추행' 전직 검사 구속영장 청구 (연합뉴스 2018-03-28 )>

... A씨는 검사 재직 중이던 2015년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한 후배검사를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사표를 제출하고 검찰을 떠났지만, 피해자로 알려진 검사는 2차 피해를 우려해 그에 대한 감찰이나 조사를 해달라는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A씨는 처벌이나 징계절차가 이뤄지지 않은 채 사표가 수리됐고, 대기업에 취업했다.

조사단은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여러 명이라는 단서를 추가로 확보한 후, 해외연수 중인 A씨에게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소환통보에 응하지 않던 A씨는 조사단이 입국 시 통보 및 출국 금지 조처를 내리며 압박하자, 12일 조사단에 출석해 15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단은 A씨를 상대로 성추행 의혹을 둘러싼 사실관계 등을 집중 추궁한 뒤 범죄혐의가 충분히 소명될 뿐만 아니라 A씨가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했다. ...

법원은 그러나, A씨의 영장을 기각했다. '귀족 검사'라는 별칭으로 불린 이유 중 하나였던 가족관계와, 여느 직종보다 준법정신이 강조됐을 종전 직업-전직 검사-이 기각 사유로 언급됐다.
<'성추행' 전직 검사 구속영장 기각…"도주·증거인멸 우려 없어" (연합뉴스 2018-03-30)>

... 허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주거와 가족관계, 종전 직업에 비춰 도망할 염려가 있다고 볼 수 없고 이미 수집돼 있는 증거의 내용을 고려할 때 증거인멸 염려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영장을 기각한 사유를 설명했다. ... 영장 발부를 예상했던 조사단은 법원의 기각 결정에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조사단 관계자는 "법원의 기각 사유를 검토한 후 구속영장 재청구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전직 검사 A씨와 조사단이 혐의 입증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A씨가 현직에 남아있던 시기, 해당 여검사가 대검에 피해 사실을 진술하고, 처벌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사실이었다. 그간 '2차 피해를 우려해 감찰이나 조사를 해달라는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다'고 전해졌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런 사실은 조사단이 피해 검사와 접촉해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 새롭게 드러났다.
검찰그렇다면 정식 감찰뿐 아니라 수사로 이어졌을 수 있었던 사건이 묻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벌 의사가 확인됐는데도 A씨가 제약 없이 사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검찰은 사건의 어느 수준까지 파악해 어떻게 대처했던 걸까?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이런 질문들에 힌트가 될 만한 사실도 같이 공개됐다. 피해자 조사 과정에 진술을 녹음했던 음성 파일이 있었지만,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다.
'성폭력 피해 여검사 의견' 기록서 삭제…사건 무마 의혹 (SBS 8뉴스 2018-04-04)

후배 여검사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검사가 현재 검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났던 3년 전 대검에서 피해 여검사를 조사했었는데 당시 진술 내용을 녹음했던 음성 파일이 사라진 걸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 최근 조사단은 피해 여검사 본인이 기억하는 당시 진술과 대검에서 넘겨받은 조사 자료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사단은 당시 조사가 녹음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대검에 조사 전 과정을 녹음한 파일을 요청했지만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핵심 증거물이 사라진 겁니다.

대검이 부랴부랴 파일 복구 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감찰 조사에서는 피해 사실에 대한 구체적 진술뿐 아니라 A 씨에 대한 처벌 의사 등 핵심적인 문답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검사는 피조사자가 동의하는 경우 진술 전 과정(검찰사건사무규칙 13조의8 1항)을 녹화(형사소송법 221조 1항)한다. 이후 저장된 파일로 영상녹화물(CD, DVD 등) 2개를 제작하고, 그중 하나는 기명날인 또는 서명을 받아 피조사자 면전에서 봉인, 보관한다. 또,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수사기록에 편철(검찰사건사무규칙 13조의9 1항)해야 한다. 현직 검사인 피해자가 이런 규정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당시 SBS 취재에 따르면 검찰 내 어디에서도 해당 음성파일은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