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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조선인 집단매장지 '천인갱'을 방문할 순 없을까?

[취재파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조선인 집단매장지 '천인갱'을 방문할 순 없을까?

고정현 기자 yd@sbs.co.kr

작성 2019.03.21 17:1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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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조선인 집단매장지 천인갱을 방문할 순 없을까?
하이난 섬에서 취재를 마취고 지난달 19일 귀국해 짐을 풀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었는데, 조금씩 집 안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매우 불쾌하지만 익숙한 악취. 한참 동안 악취가 시작된 곳을 찾아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발에서 나는 악취였습니다. 하이난성 '천인갱(千人坑)'에서 밟았던 오물이 신발에 그대로 스며든 거였는데, 참지 못하고 그대로 신발을 버렸습니다.
돼지 축사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천인갱'에 쌓였다 ●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1천 명 매장됐다는 '천인갱'

중국 하이난성 남쪽 싼야시(三亞市).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서귀포시 정도 되는 위치인데, 싼야시 시내에서 차로 15분 정도만 가면 '천인갱'이 나옵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1천 명이 집단 매장된 구덩이란 뜻의 '천인갱'. 혹자는 문자 그대로 1천 명 이상이 매장됐다고 하고, 혹자는 '천인갱'이란 지명은 중국인 특유의 과장된 문법으로 1천 명까지 매장은 아니고 그 정도로 많이 매장됐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됐던 '천인갱'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더러웠습니다. '천인갱' 공터 곳곳에는 시커먼 오물이 하루 종일 내리쬐는 남중국해의 뜨거운 햇볕에도 증발되지 않고 남아 큰 구덩이를 이뤘습니다. 뜨거운 공기가 불어올 때면 역겨운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습니다. 현지 주민들이 얼마 전까지 농사를 지었는지, 밭이랑과 고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천인갱' 오른편 돼지우리는 담장을 비집고 들어왔고, 왼쪽 담장은 아예 사라지고 현지 주민들이 가져다 놓은 관이 쌓여 공동묘지를 방불케 했습니다. 돼지우리 바로 옆에 있는 '천인갱' 추모관 건물 안 상황은 더 참담했습니다. 조선인 유해를 빻아 모셔놓은 유골함 절반은 텅 비어 있었고, 완전체로 발굴해 모셔둔 유골 5구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추모관 안에 걸린 태극기만이 여기가 '대한민국'과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줬습니다.
'천인갱' 추모관 내부 모습…유리관 내 '완전체' 유해는 모두 사라졌다 ● 24년 전 세상에 알려져…국내 중소기업이 추모 장소로 정비

'천인갱'은 중국 하이난성 지방정부가 1995년 펴낸 '철제하적성풍혈우(鐵蹄下的腥風血雨)'란 책에서 처음 소개됐습니다. 하이난 섬에 있던 일제 치하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구술을 엮은 책인데, 그 속에 '천인갱'에서 일하던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폭력과 살인, 집단 매장 행위 등도 적혀 있는 겁니다. '천인갱'이 처음부터 이렇게 방치되고 외면받은 건 아닙니다. 2000년 대 초반에 촬영된 '천인갱' 사진을 보면, 잘 정비된 입구에 잔디도 깔끔하게 깔려 있습니다, 추모관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 흔적이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90년대 말부터 하이난성에서 망고농장을 운영하던 한 국내 중소기업이 해당 부지를 임대해 추모 장소로 정비했던 겁니다. 3만 3천㎡의 광대한 부지를 임차했고, 지역 주민들은 한국인 추모객이 많이 방문할 것이라며 환영했습니다.

● "여기 시진핑은 나다"…지역 주민들의 반발

하지만 해당 중소기업이 경영난 등을 겪으면서 5년 간 토지사용료를 내지 못하게 됐고, 지역 주민들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싼야시의 부동산 개발 광풍을 보며 '천인갱'을 암적인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유골을 훔쳐가고, 담장을 허물면서 하이난성 지역 정부에 임대 계약 취소를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재단법인 '천인갱' 관계자가 왜 남의 담장을 허물고 농사를 지으며 돼지우리를 만드느냐고 따지면, 지역 주민들은 "베이징에 시진핑이 있다면 여기 시진핑은 나다"라며 막무가내로 행동했다고 합니다. 결국 과거 유골이 발굴된 1천6백㎡만 다시 계약해 땅을 임대했고, 힘들게 천인갱을 보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천인갱' 보존, 하다 보니 20년"

현재 우리나라의 한 중소 부동산 시행업체가 '천인갱' 보존을 위해 매년 토지이용료 등 수억 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업체는 과거 망고농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설립한 업체로 이젠 하이난에 아무런 연고도 사업 계획도 없습니다. 재단법인 '천인갱'과 부동산 시행업체 관계자들에게 "사업 지역도 아닌 곳에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가며 ‘천인갱’을 지키냐"고 물어보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우리 조상인데 내가 하지 않으면 여기는 곧 없어지지 않겠냐"고 답했습니다. 관계자 한 분은 "꿈에 자꾸 조상님들이 나와서 나를 땅 속으로 끌고 가더라. 기겁하고 꿈에서 깬 뒤 생각해보니 어떡해서든 '천인갱'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 삽만 꽂아도 나오는 유골…우리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사실 우리나라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집단 매장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은 '천인갱'이 거의 유일합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삽만 꽂아도 유골이 나오는 실정'입니다. 2001년 충북대 발굴팀 등이 '천인갱' 극히 일부 구역을 발굴했더니 무려 165구의 유해가 나왔습니다. 저희 SBS 취재진도 민간 발굴 전문가와 함께 2시간 땅을 팠더니 바스라진 유해 조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피해 숫자도 구체적인 데다 유해가 묻힌 장소가 너무나 명확한데도 '천인갱'은 지난 24년간 우리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아 왔습니다. 관련 부처인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진상조사가 안 된 강제 징용 피해자 유해는 정부가 나서서 수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 어느 부처에도 일제 강점기 피해와 관련해서 '진상 조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2015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지원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진상 조사' 기능이 모두 사라진 겁니다. 특별법을 통해 2기 위원회가 만들어지거나 새로 법을 제정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지난달 SBS 취재진이 '천인갱'에서 2시간 만에 발굴한 유해 ● 해방 이후 국내 봉환 유해 1만 위…대부분 '군인·군속'

해방 이후 일제 강점기 때 해외에서 사망한 군인이나 민간인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 건 1만 위도 되지 않습니다. 가해국인 일본이 126만 위 이상을 자국으로 봉환한 걸 보면 우리 정부가 얼마나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1만 위라는 숫자 중 7천6백 위 정도는 1948년 미국의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주도해 들여온 겁니다. 군인으로 추정되지만 누구의 유해 인지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3천 위도 대부분 군인이나 일본군에 소속돼 일했던 사람의 유해입니다.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민간인 유해는 사실상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는 겁니다. 3월 1일 '천인갱'에 관한 SBS 보도 이후 정부는 해방 이후 정부가 주도해 봉환한 민간 노무자 유해가 151위라고 밝혔습니다. 70년 넘도록 민간인 희생자는 고작 151위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 정부 "강제동원 민간 노무자의 유해봉환을 더욱 확대하겠다"

SBS 보도 다음 날 정부는 "'천인갱'을 비롯한 강제동원 민간 노무자의 유해봉환을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법적인 한계의 틀 속에서 어떡해서든 조선인 집단매장지로 유력한 ‘천인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최근 행안부 산하 과거사지원단 직원 2명이 '천인갱'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해 국내 봉환을 행안부 단독으로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에 외교부의 노력이 필요하고, 발굴과 DNA 감정 등에도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북한 출생 사망자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통일부의 관심도 필요해 보입니다. 결국 정부 부처의 다각적인 협력이 필요한데, 이 컨트롤 타워는 결국 국무총리실입니다.

● 다음 주 하이난 섬 방문하는 이낙연 총리…'천인갱' 방문할 순 없나?

우연찮게도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번에 하이난성을 방문합니다. 26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하이난에서 열리는 보아오포럼에 참석하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중국 충칭시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빡빡한 일정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했던 민간 노무자 희생자에 대한 관심을 정부가 가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 총리의 '천인갱' 방문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2000년 대 중반 국무총리를 지냈던 한 인사가 보아오포럼 참석 후 '천인갱'을 방문했습니다. 세워진 비석을 쓰다듬으며 한 동안 상념에 잠겼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방문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민간인 신분인 데다 정권도 교체돼 '前 국무총리'로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소득 3만 불인 나라의 현직 총리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망국의 백성이 집단으로 죽어 묻힌 장소를 찾는 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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