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中) - 트럼프는 왜 '빅딜' 카드를 던졌나?

손석민 기자 hermes@sbs.co.kr

작성 2019.03.12 10:17 수정 2019.03.17 11:5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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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결렬과 관련해 하노이 현장에서 느낀 가장 큰 의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왜 갑자기 '빅딜 아니면 노딜'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느냐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서는 물론, 1차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부터 "정상회담은 하나의 시작이고 과정일 뿐"이라는 말을 반복해왔다. 이 말은 북한과의 비핵화 일괄 타결이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이면에는 '대북 제재가 유지되는 한 급한 건 북한 아니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담판에서 기존의 말을 뒤집는 '빅딜 아니면 노딜'이라니. 때문에 이 과정을 짚어보는 것은 향후 트럼프 행정부의 협상 전략을 가늠할 수 있는 방향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언론에서는 트럼프와 김정은 간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사들이 흘러나왔다. 2월 22일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 선언과 북 핵시설의 일부 폐쇄를 교환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관련 사실을 전해 들은 전문가를 인용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평화 선언의 대가는 추가 핵무기 실험 및 생산 중지 약속과 사찰단에 핵시설 개방, 일부 시설 폐쇄 합의 등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에 미국 이익대표부를 개설하는 것과 같은 다른 당근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 핵
정상회담 전날인 26일에는 '복스'라는 인터넷 매체에서 잠정 합의문 내용을 보도했다. 협상 상황을 잘 아는 2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북미가 영변 핵시설 폐쇄와 남북 경협을 위한 일부 제재 완화, 그리고 연락사무소 설치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영변 핵시설 폐쇄(close down)'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실무그룹에서 추가 협상을 통해 세부내용을 정한다는 것으로, 복스는 핵시설 폐쇄를 위한 구체적 세부사항이나 시간표는 마련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복스는 또 27~28일 실제 담판에서 합의 내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전제했다.

SBS 취재로도 우리 정부 일각에선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해 사찰 이상의 조치를 제시하고, 미국이 상응조치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허용하는 수준의 딜이 가능하다는 예상을 내놓았다. 여기에 북미 연락사무소와 평화 선언, 그리고 문화체육 교류가 영변 '딜'의 하위 차원으로 선언문에 담길 수 있는 사안이라는 말도 나왔다. 실패할 정상회담을 하지 않기 위해 회담을 앞두고 선언문의 윤곽은 잡아놓는 게 관례라는 점에서, 영변과 관련한 정상 간 담판 부분만 공란으로 남아있고 하위 딜에 대한 합의는 일단락됐을 거라는 게 합리적인 관측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럼프, 김정은 북미 정상회담 (사진=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하지만 하노이 정상회담 일정 첫날인 27일 친교 만찬에서부터 묘한 분위기가 감지됐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의 소식통은 "김 위원장이 이 자리에서 북한 내 핵 시설 폐쇄와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를 맞바꾸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트럼프 대통령이 즉답하지 않으면서 상황이 꼬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이 던진 카드는(29일 새벽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부상의 기자회견으로 드러났지만) 영변에 대한 상응조치로 2016년 이후 경제 관련 5건의 제재 해제 요구였다. 이들 5건의 제재는 석탄과 철광석 수출 금지와 정유 제품 90% 차단, 북한과의 금융거래 금지 등으로 북한의 숨통과 직결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볼 때 북한의 요구는 영변 정도와 사실상의 제재 무력화를 교환하자는 것이었고, 영변 플러스알파를 요구해온 미국의 계산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첫날의 묘한 분위기에 이어 다음날(28일) 오전, 단독 회담과 확대 회담이 시작되면서 이상 징후가 속속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면전에 두고 "서두르지 않겠다"는 말을 네댓 차례 반복했다. "나는 처음부터 속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두르지 않는다. 올바른 합의를 하기를 원할 뿐이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본 회담 전에 쏟아냈다. 전날 만찬에서 접한 김 위원장의 제안에 이견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표시한 말들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단독 회담에서 이른바 '빅딜 카드'를 김 위원장에게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영변 플러스알파, 즉 추가 핵시설 폐기와 핵과 생화학무기까지 망라한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제재 해제와 통째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단독 회담은 예정보다 10분 일찍 끝이 났고 김 위원장은 확대 회담 시작 전 유달리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우리가 충분한 이야기를 좀 더 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는 1분이라도 귀중하니까"라고 말했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트럼프 대통령과 "1분이 소중하다"는 김정은 위원장 간 회담은 결국 '노딜'로 끝이 났다.
존 볼턴-므누신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볼턴 美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트럼프 대통령의 빅딜 제안이 확대 회담에 불쑥 배석한 대북 강경파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작품이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도 북한의 예상을 뛰어넘는 카드를 던져, 북한이 받아들이면 남는 장사이고 아니면 빈손으로 떠나면 된다는 구상을 볼턴이 현장에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미국은 정상회담 전 이미 포괄적 비핵화 로드맵을 합의하는 빅딜과 단계적 동시 조치를 취해나가는 스몰딜, 그리고 협상을 원점으로 돌리는 노딜 카드를 모두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북미 협상에 관여했던 손턴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은 '미국의소리(VOA)'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단계적 접근이든 통 큰 빅딜이든 모두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전했다. 손턴 전 대행은 "다만 중요한 것은 서로 바라는 카드 간에 가격을 맞추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북미가 각각 영변에 대해 매긴 가격부터 현격하게 차이가 났고, 이것이 결국 노딜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손턴 전 대행은 또 "북한 협상팀에 의사결정을 할 재량이 없다는 점이 정상 간 담판에 모든 걸 걸게 만든다"고 북미 협상의 위험 요소를 지적했다. 미국 협상팀으로서는 북한 협상팀을 상대로 해서는 김정은 위원장의 의중을 사전에 알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늘 실무 협상에서 맥시멈을 추구한다.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최대치를 놓고 협상에 나서지만 정작 자신들은 얼마를 줄 수 있을지 확답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북미회담 실무대표단 접촉 결과 보고받는 김정은 (사진=연합뉴스)정상회담 준비 실무 협상을 비건과 김혁철 라인이 이끌면서, 2선 후퇴설이 파다했던 볼턴 보좌관과 최선희 부상이 하노이 정상회담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도 눈길을 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문제에 집중하던 볼턴은 확대 회담 때 노란 봉투를 들고 배석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최선희 역시 김혁철의 등장으로 대미 협상에서 배제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지만, 회담 하루 전 북한이 공개한 사진으로 건재함을 보여줬다. 사진에서 최선희는 김혁철 대표보다도 김 위원장 가까이에 앉아 메모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회담 결렬 이후에는 리용호 외무상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2차 회담을 앞두고 협상장에 새로운 얼굴들이 나섰지만 결국 결정적인 국면에선 북한과 미국 서로를 뼛속들이 아는 구관(舊官)들이 등판한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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