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엘리트 체육 축소하겠다'며 하계 올림픽 유치를?

권종오 기자 kjo@sbs.co.kr

작성 2019.02.13 08:41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체육계 비리 대책 발표하는 도종환 문체부장관(가운데)체육계 폭력-성폭력 파문으로 사면초가에 빠졌던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지난 11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정기대의원 총회에서 정부의 체육계 개선 대책을 정면으로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쏟아졌던 사퇴 요구도 다시 한번 일축했습니다. 다른 대의원들도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을 집중 성토했습니다.

대한체육회와 이기흥 회장이 그동안의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문체부의 실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지난 1월 25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성폭력과 아무 상관이 없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분리안을 꺼내 들어 체육 단체를 똘똘 뭉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또 소년체전을 폐지하고 경기력 향상 연금과 병역특례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발언도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발언이 영이 안 서는 것은 물론이고 우습게까지 보인 것은 체육 정책의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체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안을 쉽게 요약하면 '엘리트 체육 축소'입니다. '엘리트 체육 축소'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문체부, 대한체육회, 일선 선수와 지도자의 생각이 각자 다를 수 있고 이 정책이 무조건 옳거나 또 반대로 무조건 틀리다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엘리트 체육 축소를 추진하려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율배반적으로 2032년 하계올림픽 유치에 급하게 나섰다는 점입니다.

도종환 장관은 오늘(13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가 있는 로잔으로 출국해 오는 15일 IOC에 2032년 하계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의향서를 제출합니다. 남측 유치도시로는 지난 11일 대한체육회 대의원총회에서 투표 끝에 서울이 부산을 제치고 확정됐습니다. 우리 정부와 서울시가 2032년 올림픽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셈입니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가 "문체부가 아주 급하게 추진해 정말 이례적으로 빨리 신청 후보 도시를 선정했다"고 말할 정도로 정부의 의지는 대단했습니다.
2032 하계올림픽 유치에 도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그런데 동서고금을 통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나라가 엘리트 체육을 축소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대폭 강화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릴 경우 무엇보다 자국의 성적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영국과 일본입니다.

영국은 2004년 아테네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9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2개로 종합 10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듬해인 2005년에 IOC 총회에서 2012년 런던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자 엘리트 스포츠 육성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습니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19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15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습니다. 자국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에서는 금메달 29개, 은메달 17개, 동메달 19개로 종합 3위로 도약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한국이 금메달 13개로 7위를 차지했고 일본은 금메달 9개로 8위에 그쳤습니다. 다음 대회인 런던올림픽에서는 한국이 금메달 13개로 종합 5위의 금자탑을 쌓은 반면 일본은 금메달 7개에 머물며 11위까지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3년 IOC 총회에서 2020 도쿄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하자 확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엘리트 스포츠에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던 일본 정부는 예산을 대폭 늘려 연 1,000억 엔(한화 약 1조170억 원) 이상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포츠 인재 육성 정책에 힘입어 일본은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로 6위를 차지하며 한국(금메달 9개, 8위)을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내년 7월 자국에서는 열리는 도쿄올림픽에서는 금메달 30개 이상으로 내심 미국에 이어 종합 2위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 대축제'를 만들겠다는 심산입니다.

2032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는 오는 2025년에 결정될 예정이지만 시기가 조금 더 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문체부의 생각대로 올해부터 엘리트 체육을 축소하다가 만약 2025년이나 그 이전에 서울-평양이 2032년 올림픽 유치권을 획득하게 되면 남북 모두 대대적인 경기력 향상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다른 나라들이 메달을 휩쓰는 것을 앉아서 가만히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트 체육 축소 정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2032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탈락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9 국가대표 훈련 개시식지난 11일 충북 진천의 국가대표선수촌에서는 뒤늦게 2019년 훈련 개시식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모은 각 종목 지도자들은 "엘리트 체육은 한번 축소하면 그 여파가 최소 10년은 간다. 떨어진 경기력을 몇 년 만에 원래 수준으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체부가 스포츠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엘리트 체육 축소 방침을 폐지하든지, 아니면 올림픽 유치를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도 해야 그나마 논리의 일관성을 세울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