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98년생 김철수 : 블루칼라의 반란

대한민국과 난민, 솔루션 저널리즘 ②편

이경원 기자 leekw@sbs.co.kr

작성 2019.02.07 09:05 수정 2019.02.11 09: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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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본령은 감시와 비판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친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무관심과 냉소를 불러 민주주의를 되레 침식시킬 수 있습니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찾는 '솔루션 저널리즘'은 이 지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언론이 흔히 즐겨 쓰는 '법 개정', '처벌 강화', '지원 확대' 같은 표제어가 꼭 솔루션일 필요는 없습니다. 솔루션 저널리즘의 핵심은 정확한 현실 인식과 변화를 위한 상상력입니다. 데이터를 통해 상상력을 동원하고 여기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을 기록하는 일련의 작업이 그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솔루션 저널리즘과 데이터 저널리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데이터 없이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적확한 솔루션도 어렵습니다. 솔루션에는 데이터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언제부턴가 솔루션 저널리즘에 기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루션이 어려운 주제로 모험을 해보려고 합니다. 예멘 난민 논란으로 촉발된 이방인에 대한 혐오 문제입니다. 워낙 반감이 거세 기자로서 꽤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난민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 해법이 무엇인지 곱씹어보려 합니다. 솔루션의 밑천은 데이터에 있는 만큼, 데이터 분석에 상당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① 난민의 사회학 : 낯선 자에 대한 공포
② 98년생 김철수 : 블루칼라의 반란
③ 게이와 이방인 : 관용의 경제학
④ 이방인의 변호권 : 이자스민의 추억
⑤ 순수(純粹)로부터의 해방


● 이방인 규모와 공포의 상관관계

①편 '낯선 자에 대한 공포'는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방인이 많은 곳일수록, 즉 이방인을 자주 접촉하는 지역일수록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클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미국의 각 주(州) 별 이방인 규모의 척도로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인구 비율', 외국 출생 인구(Foreign Born Persons)의 비율로 삼았습니다. 미국의 각 주(州)별 이방인에 대한 반감의 척도는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득표율'로 정했습니다. 트럼프의 인기 비결은 그의 '아메리칸 퍼스트', 이른바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방인에 대한 반감도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각 주(州)별 이방인 규모 :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인구 비율
미국 각 주(州)별 이방인 반감 : 2016년 대선 트럼프 득표율


둘의 상관관계를 따져 봤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둘의 상관계수 값은 -0.63, 강한 음의 상관관계가 규명됐습니다. 이민자나 난민, 미등록 외국인 같은 다른 인종이 싫어서 트럼프를 찍었다면, 트럼프는 이방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야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방인이 많은 곳이 오히려 트럼프 득표율이 낮았다. 즉, 이방인이 많은 곳일수록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낮은 것으로도 분석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부연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반감의 근거는 '현실의 구체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미래의 막연한 공포' 혹은 '불안감'에 근거한다. 다만, 막연한 게 더 무섭다는 건 당연하다. 공포의 속성이다.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공포가 객관적으로 과장됐을지라도,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①편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 학력 수준과 트럼프 득표율

이제부터는 누가 그런 공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따져보겠습니다. 이번에도 ①편과 비슷한 데이터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외신을 보니 학력 수준이 트럼프 득표율에 영향을 미쳤다는 보도가 꽤 있습니다. 학력 수준에 따라 트럼프 득표율이 차이를 보인다면, 학력 수준이 이방인에 대한 반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이 규명될 수 있습니다. 분석의 가정은 이렇습니다.

저학력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트럼프의 득표율이 높았을 것이다. 즉, 저학력자들이 이방인을 향해 상대적으로 강한 공포를 느낀다.

물론 언론에서 '저학력자'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학력에 민감한 우리 사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좀 더 면밀히 상황을 분석하자는 취지니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상관관계를 분석하겠습니다. 첫 번째 지표는 미국 각 주별 25세 이상 인구 가운데 대학 학위 이상 학력자 인구 비율입니다. 고학력자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입니다. 국가 통계 사이트 인덱스 문디(Index Mundi)를 참고했습니다. 2013년 자료입니다. 미국 대선이 있었던 2016년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료 : Index Mundi, Bachelor's degree or higher, percent of persons age 25+, 2009-2013)

두 번째 지표는 트럼프 득표율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반감의 척도로 쓰려고 합니다. ①편과 동일한 데이터입니다. 뉴욕타임스의 인포그래픽 자료를 활용했습니다. (자료 : Presidential Election Results, 뉴욕타임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미국 각 주(州)별 고학력자 규모 : 25세 이상 인구 가운데 대학 학위 이상 비율
미국 각 주(州)별 이방인 반감 : 2016년 대선 트럼프 득표율


각 주별 학위 이상 학력자 비율이 높은 순서대로 나열했습니다. 옆은 트럼프 득표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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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트럼프 득표율이 낮아 보입니다. 학위 이상 비율이 과반을 넘는 워싱턴 DC는 트럼프 득표율이 4.1%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학위 이상 비율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켄터키, 아칸소, 웨스트버지니아는 트럼프 득표율이 60%를 넘었습니다.

좀 더 정밀하게 상관계수를 활용해 보겠습니다. 상관 계수 값은 반드시 -1과 1 사이에 위치하는데, -1에 가까울수록 강한 음의 상관관계, 1에 가까울수록 강한 양의 상관관계입니다. 0에 가깝다면 상관성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0.5 이상, -0.5 이하면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설명은 ①편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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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는 매우 강한 음의 상관관계입니다. 앞서 ①편에서 이방인의 비율과 트럼프 득표율 간의 상관계수가 -0.62였는데, 이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들을 분석할 때 학력은 매우 중요한 변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이터 분석의 결론입니다

저학력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트럼프의 득표율이 높았다. 즉, 저학력자들 많은 지역에서 이방인을 향한 공포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 오바마에서 트럼프… 블루칼라의 변심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학력 수준이 낮은 지역일수록 이방인에 대한 반감이 컸던 걸까요. 미국 하버드대 야스차 뭉크의 분석을 참고하겠습니다.

트럼프를 선호하는 유권자들은 대학 학위를 소지했다거나 전문 직업을 가졌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다. …… 고도로 일상화되고 반복적인 업무, 즉 로봇으로 쉽게 교체되거나 해외로 이전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트럼프에게 투표할 확률이 훨씬 높다.
- 야스차 뭉크, 함규진 옮김, 2018, <위험한 민주주의>, 와이즈베리, 204쪽

즉, 이런 지역은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는 블루칼라가 많은 곳일 가능성이 큽니다. 단순 노무직은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면 대체될 가능성이 큽니다. 고용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사무 자동화 역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단순 노무직이 많은 곳은 그만큼 노동 대체에 대한 불안감이 큰 지역이기도 합니다. 미국 정치학계에서도 트럼프 득표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권자의 특성으로 '학력 수준'을 꼽는 데 반론이 없는 듯합니다.

학계는 이런 불안감이 인종주의와 맞물린 점에 주목합니다. 히스패닉이 대거로 유입되는 상황 속,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유권자들은 이들에 대한 불편함을 인종적 렌즈를 통해 봤고, 이방인에 대한 반감으로 외연이 넓혀졌다는 겁니다. 트럼프는 이런 반감을 기막히게 공략했고, 그렇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역적 특성을 뭉뚱그려 설명했지만, 좀 더 정밀한 통계를 활용해 보겠습니다. 여론조사를 통해 2016년 대선 유권자들을 분석한 전미선거연구소(ANES)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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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보면, 백인 단순 노무직 유권자 가운데 27.2%가 4년 전 오바마를 찍었다가 트럼프로 지지를 바꿨습니다. 4년 전 투표를 하지 않았다가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은 58.5%였습니다. 고졸 이하의 백인을 따져 봐도 비슷합니다.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갈아탄 사람은 28.7%, 투표하지 않다가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이 59.7%였습니다. 전체 유권자와 비교했을 때, '원래 투표하지 않았다가 트럼프에 투표했던 사람'은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들 유권자 가운데 트럼프로 지지를 바꾼 사람들입니다. 전체 유권자로 따지면 12.7%가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지지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백인 단순 노무직이나 학위를 소지하지 않은 백인은 30% 가까이 됩니다. 전체 유권자 비율과 비교하면 2배가 넘습니다. 오바마를 지지했다가 트럼프로 돌아선 이들의 변심은 유독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즉, 트럼프 당선을 견인했던 데는 백인 블루칼라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에 대한 공포심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심지어 그 공포심은 진영 논리의 힘을 가뿐히 넘어설 정도로 거셌습니다. 노동자들은 성장을 중시하는 공화당보다 분배에 힘을 주는 민주당을 더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백인 블루칼라는 민주당의 큰 지지기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돌아섰습니다. 그 공포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미래가 두려운 블루칼라

그렇다고 당장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트럼프 득표율과 주별 빈곤선 이하 인구 비율을 따져봤습니다. 빈곤선은 적절한 생활 수준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 소득 수준입니다. 지난해 미국의 2인 가구 빈곤선은 1만 6460달러, 3인 가구는 2만 780달러, 4인 가구는 2만 5100달러입니다. 국가 통계 사이트 인덱스 문디(Index Mundi)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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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상관 계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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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빈곤선 이하 인구 비율과 트럼프 득표율의 상관 계수는 0.25입니다.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당장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게 아니라 앞으로 빈곤해질 확률이 큰 지역에서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 다시 풀어 보면,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보다, 어려워질 걸 우려하는 사람들의 공포가 더 거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①편 '낯선 자에 대한 공포'에서, 공포는 '현실의 구체적 경험'보다는 '미래의 막연함'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분석과 맞닿아 있습니다. 빈곤 계층이라고 해서, 경제적 재난을 겪었다고 해서 공포심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가 가혹해질까 봐 두려운 사람들이 그 공포를 더 절실히 느낍니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자신은 비교적 부유하더라도 이웃들이 다른 형태의 고난을 겪는 곳에 거주한다. 그들의 지역 사회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백인 거주자가 더 일찍 죽고, 가난하게 자란 젊은 사람들이 성공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 스스로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차세대를 위한 경제적 기회가 부족한 곳에서 살고 있다.
- 맥스 이렌프로이드, 제프 구오 <A massive new study debunks a widespread theory for Donald Trump's success>, 워싱턴포스트, 2016년 8월 12일

이런 분석 결과를 우리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98년생 김철수

98년생 김철수 씨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바로 산업 현장에 취직했습니다. 하루 종일 생산라인에서 부품을 조립하며 쉴 틈 없이 일합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정규직들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가끔 현장에 나와 "납품 기일 맞춰야 한다"며 싫은 소리 몇 마디 툭 내뱉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버립니다. 꼴 보기 싫습니다.

현장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불법체류자도 더러 있습니다. 이들의 월급은 자신들의 절반밖에 안 됩니다. 고향 떠나와 일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지면 내 처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긴, 내가 사장이라도 월급 덜 줘도 되는 외국인을 고용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식당에서 일하는 친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종업원 상당수가 중국 동포라며, 이제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한국인을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빗장이 풀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잔업까지 하고 퇴근하면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습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세상 밖 소식을 접하는 창구는 포털 사이트에 떠 있는 뉴스를 간간히 읽는 겁니다. 예멘에서 난민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눈에 띕니다. 나는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한가롭게 이들을 받아주니 마니하고 있다니 갑자기 화가 납니다. 댓글을 답니다. 왜 내가 낸 세금을 이 사람들 먹여 살리느냐고 정부와 국회의원들을 향해 욕설을 쏟아냅니다. 인터넷을 보니 유럽은 이미 난민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누구는 인권 타령하고 앉아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벌써 12시가 넘었습니다. 내일 또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눈을 붙입니다.


98년생 김철수 씨 일일은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블루칼라들의 가상 사례입니다. 위험한 기계에 몸을 맡기며 목숨을 걸고 쉴 틈 없이 일하지만,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불안한 삶. 팍팍한 대한민국에서 누군들 미래가 막막하지 않겠냐마는, 98년생 김철수 씨는 적어도 '이방인을 향한 공포'에 꽤 노출된 계층이라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당장 이방인들이 경제적으로 쓸모 있다는 걸 몸으로 부대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멘 난민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김철수 씨가 불쾌했던 건 자신의 처지에 빗대 볼 때 불가피한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김철수 씨가 맞닥뜨린 환경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공포를 과소평가합니다. 심지어 인격적으로 못나서, 도덕과 윤리가 어그러져서 그러고 있다고 공자님 말씀으로 훈계하기도 합니다. 사실 주류 언론은 김철수 씨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스스로 의식 있다고 믿는 기자들은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야박해졌느냐며 한탄하는 기사를 씁니다. 자기 살기 힘들다고, 센 사람보다 약한 사람 탓하는 거라며 거창한 '스케이프 고트' 이론을 들먹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기자는 진실을 밝히겠다며 가짜 뉴스를 밝혀내는 작업을 합니다. 팩트 체크란 이름으로 98년생 김철수 씨가 단 댓글을 하나하나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당신들 참 못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욕을 해대나?"는 식의 밥맛없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읽힙니다. 댓글에는 기레기라는 말이 달립니다. 훈계 저널리즘이 제대로 소비될 리 없습니다.

사실 주류 언론은 98년생 김철수 씨의 일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이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겠다고 찾는 곳은 서울 신촌 같은 대학가입니다. 사실상 기사는 명문대생들의 인터뷰로 채워지고, 이런 인터뷰의 조각들이 젊은이들의 생각으로 일반화됩니다. 뉴스에서 말하는 '젊은이'는 '명문대생'을 뜻하고, 20대 취업 문제는 '명문대생의 취업'과 동의어가 됩니다. 언론에 흔히 오르내리는 '취업난'은 이들에게는 '고액 연봉 화이트칼라'가 되고 싶은 욕망과 투쟁의 현장일 뿐입니다. 98년생 김철수 씨의 삶이 주목받는 유일한 경우는, 하청 노동자로 일하는 또래 젊은이가 현장에서 처참하게 희생됐을 때입니다.

가상 사례를 성급히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지점이 우리가 난민 문제에서 지금껏 제대로 보지 못했던, 아니, 정확히는 보지 않으려 했던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 2016년 대선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백인 블루칼라들이 트럼프에 열광했던 건, 단순히 그들의 도덕과 윤리가 메말라서가 아니라, 미래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들을 별로 조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공포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 반감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진단합니다.

지금까지 두 편의 글에서, 미국의 대선 사례를 빗대 이방인에 대한 공포의 본질을 해부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현실의 구체적 경험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한 이들에게는 그런 현실이 무서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포를 가장 절실히 느끼는 계층은 젊은 블루칼라이며, 이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 없이는 솔루션이 어렵습니다.

③편 '관용의 경제학'에서는 관용이라는 규범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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