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단독] 안희정 2심 판결문 입수…'학습된 무기력'

전형우 기자 dennoch@sbs.co.kr

작성 2019.02.03 16:26 수정 2019.02.03 17: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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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2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판결문 중 요약본을 낭독해 판결문 전체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SBS는 안희정 전 지사 2심 판결문 전문을 입수했고, 선고 당시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분석했습니다.

▶ [단독] 성폭력 외면한 안희정 측근들…法 '학습된 무기력' 인정

● 학습된 무기력

항소심 판결문에 따르면, 수행비서였던 피해자 김지은 씨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성추행 사건 폭로 전에 또 다른 성추행 사건을 문제제기 했습니다. 안 전 지사의 운전을 담당하는 비서였던 A씨가 김지은 씨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과 발언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김지은 씨가 수행비서직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인 2017년 7월, 김 씨는 운전비서와 안희정 전 지사 양 쪽에게서 정도는 다르지만 성폭력을 당했다고 검찰에 진술했습니다. 김 씨는 양 쪽에서 성적수치심을 느낄 행동을 당하자 "약간 노리개가 되는 느낌도 들었다. 여기 정치판은 이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김 씨는 안희정 전 지사 건은 전임 수행비서 외에는 주변에 알리지 못했지만, 운전비서의 성추행 건은 함께 일하는 안희정 전 지사의 측근들에 알렸습니다. 김 씨는 당시 안희정 전 지사의 비서실장이었던 B씨에게 운전비서의 성추행에 대해 문제제기 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B씨는 "그래서 (운전비서 A씨가) 사과했다며, 수행비서는 하고 싶다는 사람 많아. 너 관둬도 돼. 그런데 운전은 힘들어서 하고 싶다는 사람이 없어. 지금 A씨 대신할 사람이 없어."라는 취지로 답했다는게 김지은 씨의 검찰 진술입니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선거캠프의 주요 인사였던 C씨에게도 김 씨는 다섯 차례에 걸쳐 이 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김 씨 진술과 증거로 채택된 메시지 등에 따르면, C씨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런 갈등이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가 죽는다", "한명이 문제 제기하면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인가보다 이래버릴 위험이 있겠지 다른 사람 보기엔 멀쩡하거든", "혼자서 설득할 자신 있음 달려들어 계속 얘기하지만 어설프게 할 거면 하지 말고", "무뎌져라, 여기선 자기 자신을 놔야한다."(항소심이 채택한 증거기록 중) 

김지은 씨는 운전비서 성추행 건을 해결해 줄 의지가 있는 사람이면 안희정 성폭력 얘기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판결문에 적힌 정황들을 보면 안희정 전 지사의 핵심 측근들은 김 씨의 문제 제기에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지은 씨는 결국 운전기사 성추행 폭로를 둘러싼 경험 뒤, 안희정 건 폭로를 하면 "나만 잘리고 말겠구나, 나만 이상한 여자가 되겠구나" 하고 느꼈다는 게 판결문에 적시돼 있습니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는 운전비서 성추행 폭로 건에 대해 정반대의 판단을 내립니다. 먼저, 1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김지은 씨가 '학습된 무기력' 상태가 아니라는 증거로 봤습니다. 운전비서 사건은 성폭력으로 명확히 인지하면서 적극 대처를 할 만큼, 성폭력 대응에 무기력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오히려 김지은 씨가 운전비서 사건 폭로와 측근들의 대응 과정에서 무기력을 학습한 것으로 봤습니다. '운전비서 성추행 건에 대해서도 주변의 대응이 이러한데, 유력 정치인이었던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건 피해 호소를 받아줄 사람은 더욱 없겠구나' 생각한 김지은 씨의 상태는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심 재판부는 이로 인해 김지은 씨가 안희정 전 지사의 반복된 성폭력에도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문제 제기 할 수 없었던 점을 인정했습니다.

● 인정된 '업무상 위력의 행사' 

검찰은 안희정 전 지사의 업무스타일과 수행비서직의 특성에 대해서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검찰은 김지은 씨 외에 안희정 전 지사의 수행비서를 경험한 이들을 불러 이에 대해 물어봤고, 2심 재판부도 이러한 진술조서를 증거로 채택해 판결문에 명시했습니다. 안희정 전 지사에게 업무상 위력이 존재했고 실제로 행사됐다는 사실을 판단하기 위해섭니다.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를 경험한 세 명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안희정은 원하는 것이 바로 되지 않거나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경우에는 불편한 표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간혹 있었고, 그때 위압감을 강하게 느껴 저런 표정이 생기지 않도록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안희정은 주로 말로 혼내는 것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상대에게 위압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예 말을 하지 않거나 담배만 계속 피우거나 상대방에게 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방식으로 꾸짖었다. 그래서 안희정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시급하고 원하는 요구에 맞춰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안희정의 지시를 거부한 적이 없다. 안희정이 작은 지시를 하더라도 거절하기 어렵고, 직접 지시가 없더라도 조직문화 자체가 모든 것을 안희정에게 맞추도록 요구하는 상황이 있다. 특히 수행비서는 안희정이 특별한 배려를 해주지 않으면 거절을 할 수 없다."

"평소 수행비서는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안희정의 분신과 같이 행동하도록 요구받았고 강한 책임감과 압박감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다. 결과적으로 안희정의 지시사항에 대해서는 경중을 떠나 뭐든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도록 하였다."

(검찰 진술조서 중)


김지은 씨는 "안희정 전 지사가 경찰, 검찰과 수시로 전화통화를 하고 변호사나 국회의원들도 연락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피해사실을 감사기관에 이야기하겠나." 생각이 들었다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만나서 자기 행보 문제를 상의하는 사람으로 절대 권력이 있는데 어떻게 문제제기를 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거나, '나 하나 사라질 수 있겠다'고 느꼈다"고 성폭력 피해 호소에 어려움을 겪었던 상황을 법정에서도 토로했습니다.

안희정 측 변호인은 김지은 씨의 진술 신빙성을 배척하기 위해 재판 과정에서 여러 가지 주장을 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뒤 안희정 전 지사를 위해 순두부집을 물색했다는 점, 와인바에 함께 갔다는 점, '^^,ㅠㅠ' 같은 '애교섞인' 이모티콘을 사용했다는 점 등 성폭력 피해자로 보기 힘든 행동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격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며 위와 같은 안희정 측 변호인들의 주장이 "특정하게 정형화한 피해자의 반응만을 정상적인 태도라고 보는 편협한 관점"이라고 질타했습니다.

● 판결 형식부터 '성폭력 사건' 고려한 재판부
안희정안희정 전 지사 사건의 2심 재판부는 서울고등법원의 성폭력 전담 재판부 중 하나인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 부장판사, 주심 성언주 판사)입니다. 서울고법 형사12부는 2년간 성폭력 사건을 맡아오면서 지난해에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로부터 우수재판관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는 선고의 형식부터 성폭력 사건임을 고려했습니다. 안 전 지사의 혐의는 총 10개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피감독자간음) 4건과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건, 강제추행 5건으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 선고 당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을 묶어 선고하고, 나머지 강제추행 건을 선고했습니다. 혐의별로 선고하는 일반적인 형사사건의 형식으로 선고한 겁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혐의별 선고가 아니라 시간적 순서에 따른 선고를 택했습니다. 가장 첫 성폭력 사건인 2017년 7월 29일 러시아 보트 성추행부터 마지막 성폭력인 2018년 2월 25일 마포 오피스텔 간음까지 시간 흐름에 따라 사건을 판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기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은 2017년 8월 중순~말경 도지사 집무실 성추행 건은 증명이 부족하다며 무죄로 봤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10차례 성폭력 과정에서 피고인과 피해자의 업무상 관계, 피고인과 피해자의 감정과 심리 상태, 개별 사건에 관련된 주변인들의 유무와 경험, 주변 상황 등이 모두 동일하지 않고 점차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따라서 "각 범행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함이 상당하다"고 썼습니다. 이처럼 2심 재판부는 판결의 형식에서부터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고려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것으로 분석됩니다.

지난해 한국사회를 휩쓴 '미투 운동'은 대법원 판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 문화와 구조로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호소 과정에서 오히려 2차 피해를 겪어왔던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판결할 때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판단해 피해자 진술을 섣불리 배척하지 않는 '성인지 감수성'을 갖춰야 한다는 판례를 세웠습니다. 2018년 4월 대법원 판례에 이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이번 안희정 전 지사 항소심 재판으로 성폭력 판결의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