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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연도 수화통역…속사포 랩도 가능합니다

[취재파일] 공연도 수화통역…속사포 랩도 가능합니다
헝겊 인형 프레드는 우주비행사가 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형이 어떻게 우주비행사가 되겠느냐며, 인형은 파티에서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일이나 하라고 합니다. 직업센터 담당자는 빨리 직업을 구하지 않으면 '인형 생활 보조금'이 깎여서, 프레드를 조종하는 퍼펫티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해고해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프레드는 할 수 없이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일을 시도해 보지만, 자신에게 영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김수현 취파용
장애-비장애 배우 통합 극단으로 유명한 영국 하이징스 극단이 '프레드(Meet Fred)'라는 연극을 갖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영국문화원과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공동 주최한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 영국> 시리즈의 개최 작으로 공연됐습니다. '프레드'는 인형을 내세워 장애인이나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재치 있게 풍자합니다.

프레드는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그저 흰 헝겊으로만 이뤄진 인형입니다. 이 인형극은 인형을 조종하는 퍼펫티어의 존재가 숨겨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지만, 전혀 이질감 없이 인형과 퍼펫티어가 일체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극의 진행에 따라 '인형 생활 보조금이 깎이면서' 퍼펫티어 한 명이 해고되고, 프레드는 이 때문에 다리를 못 쓰게 됩니다. 저는 공연을 보면서 프레드와 함께 웃고 함께 슬퍼했습니다. 이 작품은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인형이 살아서 진짜 울 수 있을 것 같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죠.
김수현 취파용
이 공연의 무대에는 배우들과 함께 수화통역사도 등장합니다. 이 공연의 수화통역은 촛불집회 때 흥 넘치는 수화통역으로 화제가 되었던 통역사 최황순-김홍남 씨가 맡았습니다. (당시 최황순 씨의 활약상을 비디오머그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 수화계의 '흥부자' 촛불집회 화제의 수화통역사) 이들은 영어로 진행되는 이 공연을 효과적으로 통역하기 위해 2주 전부터 연습했습니다. 배우 여럿이 등장할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해 대사를 나눠 통역해서 더욱 실감 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는 수화를 모르지만, 수화통역사의 표정이나 몸짓만 봐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통역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재미있어서 자꾸 수화통역만 보게 되더라'고 했더니 '그러면 수화통역을 잘못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실감 나게 공연 내용을 전달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화통역을 보느라 본 무대에서 진행되는 중요한 상황을 놓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공연 수화통역에 고려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김수현 취파용
이 공연은 장애인 관객만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일반 관객들에게 표를 판매한 공연이었습니다. 영어로 진행되는 공연이라 당연히 대사를 한국어로 번역한 자막이 제공되었습니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청각 장애가 있는 관객이라도 자막을 보면 되는데 수화통역까지 필요할까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니 이해가 되더군요. 자막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수화통역사는 대사에 실린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게다가 자막으로 표현되지 않는 천둥소리, 빗소리, 신음소리 같은 효과음이나 음악 소리도 통역해서 총체적으로 극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즘 들어 콘서트나 연극에서 수화통역자를 두는 경우가 늘고는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 공연 수화통역은 특별한 '이벤트'에 속합니다. 날을 정해서 장애인 관객들을 초청한다든지, 장애인 복지 차원에서 따로 공연을 마련한다든지, 이런 식입니다. 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일찌감치 보편적인 문화 향유권에 관심을 갖고 일반 공연에도 자막과 함께 수화통역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래퍼 에미넴의 공연에서 속사포 같은 랩을 번역하는 수화통역사가 세계적인 화제가 된 바 있는데요, 영미권에서는 랩 전문 통역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공연 수화통역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이징스 극단은 장애인 배우들을 '배려해서' 공연에 끼워주는 정도가 아니라, 장애인 배우들도 똑같이 직업 배우로 활동하는, '장애-비장애 통합 극단'입니다. '프레드'에 출연한 배우들 중에 세 명이 지적장애나 자폐증이 있는 배우라고 들었지만, 공연을 보니 배우들에게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이징스 극단은 장애를 가진 배우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주고, 이들의 연기를 연극이나 영화 등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공연에 온 청각 장애 관객들을 인터뷰한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면 수화통역사 김홍남 씨가 이를 수화로 번역했고, 역시 수화로 한 관객의 대답을 김홍남 씨가 또다시 음성으로 통역하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들은 자막이나 수화통역이 있는 공연이라면 꼭 찾아가서 보려고 하고 있답니다. 이번 공연은 특히 두 명의 수화통역사가 너무나 실감 나게 통역해 줘서 더 놀랍고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김수현 취파용
이들 역시 인형에게 감정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특히 눈도 귀도 입도 없는 프레드가 농인(청각 장애인)처럼 느껴졌다며, 프레드가 다리를 못 쓰게 되었을 때 너무 슬펐다는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퍼펫티어 한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또 프레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수화로 통역된 '프레드' 공연은, 청각 장애가 있으면 공연을 즐길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누구나 공연을 즐길 수 있고,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습니다. 이런 '배리어 프리' 공연이 한국에서도 계속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프레드는 장애인일 수도 있지만, 사회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갇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대변하는 캐릭터 같습니다. 저도 프레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고,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프레드'는 공연이 끝났지만 <이음 해외공연 쇼케이스: 영국> 시리즈 중 '조건(On One Condition)'이 17일부터 19일까지 장애인 편의를 고려한 대학로 문화예술공간 이음센터에서 공연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 장애인문화예술원 홈페이지 www.i-eum.or.kr 참고.
(사진=영국문화원 제공, 영상=유튜브 'Eminem Centr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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