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뒤흔든 '의열단'…일제가 그들을 두려워한 이유

SBS 뉴스

작성 2019.01.07 02:36 수정 2019.01.07 02:3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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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 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름 '의열단'

6일 방송된 SBS 신년특집 다큐 '의렬단의 독립전쟁'에서는 일제를 떨게 한 의열단에 대해 조명했다.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의 당시 나이는 스물여섯. 일제는 왜 그토록 그를 두려워했을까?

이에 전문가는 "지금보다 10년 정도는 의식 세계가 앞서 있었다고 봐야 한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단체로서 암살 대상에 대담하게 접근해 같이 폭사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5 파괴(破壞) 7 가살(可殺). 단순하지만 강렬한 지침을 가지고 활동하며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다.

김원봉은 늘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술로 일제를 떨게 만들었다. 이에 일제는 김원봉의 이름을 강조하며 의열단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에 일제는 의열단을 제압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실패에 멈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총봉기를 계획했다.

관동대지진 발생 당시,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는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의열단의 총봉기를 가로막았다.

당시 의열단원 50명이 동경에 잠입해있었고, 이들까지 조선인 학살 사건에 휘말려 살해당했던 것. 이에 조직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의열단은 조선인의 죽음을 그냥 볼 수 없었고 상해에서 활동하던 김지섭이 나섰다.

그는 다음 해 1월에 열리는 제국회의에서 일본인 간부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어렵게 밀항선을 구해 10일 넘게 긴 항해를 떠났다. 그는 춥고 어두운 화물칸에서 순국의 뜻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는 제국회의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황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황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그를 수상하게 여긴 경비원이 다가왔고 그는 황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오랜 항해로 습기가 찬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김지섭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일왕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은 우리 민족의 일제 패망을 바라는 염원을 보여준 것. 그리고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국했다.

총봉기가 좌절되고 김원봉은 모습을 감췄다. 그는 백기를 든 것이 아닌 언젠가 독립전쟁의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원봉은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혁명 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그는 언젠가 일본과 중국이 충돌할 것이고 독립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와 함께했던 인재들이 머물렀다는 중국의 천녕사. 이곳에 온 그들의 나이는 대체로 스무 살부터 서른 살 미만이었다. 조선혁명 정치간부학교라는 이름의 곳에 머물렀던 것.

그리고 김원봉의 예상대로 일본과 중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김원봉은 군대가 미래임을 확신했고 학교를 세웠던 것.

의열단원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조선 청년들이 합류했다. 그야말로 이는 조선 최정예가 머물렀던 것이다.

김원봉은 호가화원을 의열단의 본부로 삼았다. 그는 한 국가의 외교 분반 같은 곳에 머물며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것.

그리고 의열단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것.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국 대학 졸업, 미국, 일본, 러시아 등에서 온 지식인들로 조선의용대가 구성됐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최전선에서 스피커를 통해 일본군들에 담화를 했다. 깊은 밤 일본군의 초소에 가서 고향을 그립게 하며 투항을 권고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대형 연을 만들어 선전했고, 통행증을 뿌리는 등 기발한 선전 활동을 펼쳤다.

1940년, 김원봉은 중국의 국민당과의 갈등을 감수하고 조선의용대의 화북행을 결정했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합류했다. 이는 독립전쟁을 위한 선택이었다.

화북 지역의 작은 지역 호가장. 이곳에는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호가 장전. 일본군은 300명이 넘고 조선의용대 대원은 20명 남짓.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4명의 동지를 잃었다. 그리고 호가 장촌의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예를 차리고 기리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당시 남장촌의 주민은 "당시 잘생기고 젊은 남자들이 많았다. 주민들이 농사를 하는 법을 알려줬다"라고 증언했다.

조선의용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황무지를 갈고 농사를 했던 것. 그들은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상점의 이름은 삼일 상점. 그 순간에도 독립군으로서의 신념은 잊지 않았다.

십자령 전투 당시 조선의용대는 고지에서 필사적으로 버텼고, 이때 팔로군이 무사히 퇴각했다. 등소평 등 중국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때 조선의용대의 활약으로 목숨을 지켰다. 하지만 이 전투로 김원봉은 오랜 친구 윤세주를 잃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도 그의 공로를 인정해 각별하게 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조국 진입을 목표로 끊임없이 진격했다. 그리고 국제 정세는 점차 유리하게 변했다. 그리고 1945년 연합군은 전쟁을 끝냈다. 일본은 항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침내 조선은 승리했다.

독립 전쟁의 승리를 맞은 의열단은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원봉도 26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의열단 단원과 희생당한 단원들의 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부하를 통해 실현했기에 어느 누구보다 그들의 넋을 높게 칭송하고 알리고 싶었던 것.

마지막으로 방송은 누구보다 맹렬했던 의열단의 존재를 잊어가는 현실에 아쉬움을 전하며 지금이라도 우리가 제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알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SBS funE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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