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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손 안에 들어온 편리함…'플랫폼'이라는 양날의 검

[취재파일] 손 안에 들어온 편리함…'플랫폼'이라는 양날의 검
하루 사이 시나브로 쌓인 피로로 녹신해진 몸을 늦은 밤 소파에 구겨 넣습니다. 휴대전화 액정 위로 손가락을 올리면 세상 모든 음식이 망라된 가상의 메뉴판이 펼쳐집니다. 야식계 클래식 치킨, 피자뿐 아니라 발품 파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맛볼 수 있었던 똠양꿍, 가츠동, 초밥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손가락 움직일 의지, 2천 5백 원 정도의 배송비면 식당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아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손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상의 호사입니다. 이 모든 게 '디지털 플랫폼' 덕분입니다.

플랫폼은 기차를 타고 내리는 정거장이었죠. 요컨대 승객을 필요로 하는 기차와, 기차를 필요로 하는 승객을 이어주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이 플랫폼은 기술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도 구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자를 필요로 하는 판매자와, 물건 혹은 상대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가 디지털 세계에서 직접 만나 거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마련된 겁니다. 과거엔 회사를 통해 일감을 구했다면,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개인이 직접 일감을 찾고, 소비자도 직접 필요한 물건과 노동력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가상의 플랫폼을 매개로 일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탄생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배달 대행업체의 '라이더', 휴대전화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부르는 가사 도우미나 대리기사, 우버 등이 바로 플랫폼 노동자입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은 채 플랫폼을 통해 자유롭게 일감을 찾는다고 해서 이들을 개인사업자, '사장님'으로 정의합니다.

개인사업자가 된다는 건 어떤 뜻일까요.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대신, 자신이 일한 만큼 번다는 뜻입니다. 쉼 없이 운전하고, 쉼 없이 가사 노동을 하면 이전보다 어쩌면 더 벌 수도 있다는 거죠. 동시에, 일하다 다쳐도 산재 보험을 받을 수 없고, 일을 못 하게 돼도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1년 넘게 일하다 그만둬도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월급과 사회적 안전망을 건당 수수료와 맞바꾼 시대가 된 셈입니다.
카카오T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이들이 정말 개인사업자답게 자유롭게 일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생긴 '카카오T대리'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대리기사를 원하는 승객과, 승객을 원하는 대리기사를 이어주는 온라인 플랫폼입니다. 무료서비스를 표방했던 카카오T대리는 승객이 몰리는 피크 타임에 콜을 많이 잡으면 단독 배정권을 지급하는 정책을, 한 달에 2만 원씩 낸 기사들에게만 또 승객 단독 배정권을 지급하는 정책을 몇 달 전부터 차례로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에겐 유리할 게 없는 정책인데도 이를 거부하면 일감이 줄어드니, 대리기사들은 정책이 생기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더군요. 법상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플랫폼 업체와 '단체 교섭권'도 없고, 단체 행동을 하면 담합으로 간주 돼 불법입니다.

"나는 사장이 아닌데. 분명 누군가를 위한, 누군가의 매뉴얼에 따른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 누군가가 고객인지, 플랫폼 업체인지 다른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제가 만난 퀵서비스 기사와 대리기사, 배달대행 업체 라이더 등 플랫폼 노동자들의 공통된 말이었습니다.

박지순 고려대 로스쿨 교수
"가장 큰 문제는 플랫폼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불분명하다는 겁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직장에서 출퇴근을 하며 임금을 받는 사람을 전제로 만들어진 법입니다. 규칙을 어기면 징계 등 회사의 통제도 받게 돼 있죠. 플랫폼의 등장으로 나타난 새로운 노동 모델은 훨씬 자유롭게 일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분들 역시 플랫폼 사업주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건 분명합니다. 플랫폼 거래가 단절되면 사실상 실업자 신세가 되는 거죠. 그러나 노동법상 보호가 전혀 없고, 사회 안전망에도 편입돼 있지 못하다 보니 매우 불안정한 취업 형태가 되고 있습니다. 근로자도, 개인사업자도 아닌 일종의 중간지대, 노동의 '그레이 존(Grey Zone)'이 나타난 겁니다"


플랫폼의 등장으로 노동 시장은 빠르게 파편화되고 있습니다.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 입장에선 직접 고용, 혹은 특수 고용(직접 고용 형태는 아니지만 근로자성 일부 인정해 산재 보험 등 보장 · 캐디, 퀵서비스 기사, 대리기사, 화물차 기사, 보험설계사 등)의 부담을 떠안기보단 건당 수수료만 떼어 주면 그 이상 책임질 필요 없는 플랫폼 노동자를 선호하는 게 당연할 겁니다.
맥딜리버리 리사이징
그게 현실화되고 있는 현장이 바로 맥도날드입니다. 맥도날드는 지금까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직접 고용해왔습니다. 최저 시급에 준하는 월급과 함께 4대 보험을 들어주고, 간이 안전 교육까지 실시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배달 대행업체를 쓰겠다고 밝히며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A 씨 / 11월 계약 종료된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생
"점장이 저한테 '본사에서 이제 배달대행 쪽을 쓸 거다'라고 얘기하면서 다른 일 찾아보라고 그러더라고요. 벌써 매장에 배달대행 부르는 단말기도 들여놨어요. 아르바이트생들끼리는 잘리면 이제 나도 (배달) 대행으로 가야겠다 이런 식으로 다들 많이 얘기하고 있죠"


맥도날드 한국 본사는 일부 지점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고 본사 차원의 지침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모든 지점이 배달 대행업체를 직접 고용한 아르바이트생 대신 쓰게 되는 날이 오는 건 시간문제로 보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축복입니다. 많은 면에서 인류를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막대한 자본력을 가지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쪽의 도구로만 활용될 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우린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 플랫폼 노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미국 시애틀에선 벌써 3년 전 우버 기사 등 일부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단체교섭권을 보장해주는 조례를 만들었고, 프랑스에서도 2년 전 플랫폼 노동자를 '독립 노동자'라고 정의하며 노동 3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플랫폼 노동자를 사회 안전망 안으로 끌어들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지난달 플랫폼 노동자의 규모와 플랫폼 노동의 실태에 대한 조사에 처음으로 나섰습니다. 다음 달이면 그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내 손 안에 들어온 편리함이, 과연 무엇을 담보로 잡히고 누리는 편리함인지, 우리도 잠시 숨 고르고 돌아볼 때 아닐까요.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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