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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여자는 날씬·남자는 용감"…어린이 만화 성차별 이대로 괜찮을까?

[취재파일] "여자는 날씬·남자는 용감"…어린이 만화 성차별 이대로 괜찮을까?

김민정 기자 compass@sbs.co.kr

작성 2018.10.24 09:20 수정 2018.10.24 11:1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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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여자는 날씬·남자는 용감"…어린이 만화 성차별 이대로 괜찮을까?
"뽀로로에 나오는 루피(여자 캐릭터)는 툭하면 토라지고, 요리만 좋아한다."

함께 대화를 나누던 취재원이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네 살짜리 아들이 종일 만화를 보는데, 인기 있는 만화마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성 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준다는 겁니다. 만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용감하고 개구진 남자 캐릭터. 여자 캐릭터는 상냥하고 착한 조연이거나, 쉽게 토라져 달래줘야 하는 보조적 역할로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벌써부터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말하는 아들을 보면서 내심 '남자도 울어도 되는데…" 고민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1주일에 3일 이상 TV를 보는 2~5살 유아가 70%에 달하고, 이중 절반이 하루 평균 1시간 이상 TV를 본다는 연구 결과(2018년 아주대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신윤미 교수팀)가 나옵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한 TV 시청까지 합하면 수치는 더 올라갈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자주 접하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구태의연한 묘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그런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 최근 3년간 EBS 방영 만화 65% '성차별적 캐릭터 묘사'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모임'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3년간 EBS에서 방영된 만화 시리즈 35개 중 23개 시리즈(65%)에 남녀 성 역할에 관해 고정 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과 설정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이 단체가 분석해서 정리한 내용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코코몽3
발명품을 만들거나 경쟁하는 역할은 남자, 시기하고 질투하고 견제하는 역할은 여자로 성별 역할이 명확하게 나뉜다.

로보카 폴리
주요 캐릭터 6명 중 여성 캐릭터는 1명이고 여성 캐릭터는 핑크색, 남성 주인공 캐릭터는 파란색으로 묘사된다. 사건 사고는 남성 캐릭터가 용감하게 해결하고, 여성 캐릭터는 꽃에 물을 뿌리는 등 보조적 역할로만 등장한다.

용감한 소방차 레이
여성은 예쁜 것을 좋아하고 눈물 많은 캐릭터료 묘사된다. 화장하러 가기 위해 함께 순찰한 동료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외모 꾸미기에 관심 많은 성격으로 그려진다. 집안일은 주인공의 엄마가 전담한다.

플라워링 하트
뚱뚱하다고 놀림 받는 여자아이의 문제 해결 방법으로 다이어트가 제시된다. 다이어트에 실패하자 외모를 예쁘게 꾸밀 것을 제안한다.

등장인물 성비는 어떨까요. 2015년 방송학회지에 수록된 논문 '유아 만화 프로그램에 재현된 성 역할 분석'에 따르면 지상파 3곳과 케이블 방송사 5곳 등 총 8곳의 애니메이션 49종에 나오는 등장인물 비중은 남성이 63%(147명), 여성 인물이 37%(84명)였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이 결코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평등하지 않았던 겁니다.

● "사회가 정해놓은 성 역할 무방비하게 학습…안타까워"

이런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부모들 생각은 어떤지, 들어 봤습니다.

[김신애/서울 마포구]
"딸은 소피아 공주를 좋아하고, 아들은 헬로 카봇(로보트)을 좋아해요. 딸은 공주 옷 입고 소꿉놀이하면서 요리하는 흉내를 내고, 아들은 슝슝 소리 내면서 로보트 놀이해요. 여자도 용감할 수 있고 남자도 요리하고 머리 빗질할 수 있는데…사회가 정해놓은 고정된 성 역할에 무방비하게 학습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까워요."

[윤라경/서울 송파구]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 콩순이'에서 주인공 부모는 맞벌이에요. 그런데도 콩순이를 돌보는 건 전부 엄마 몫이죠. 아빠는 늘 바깥일을 해요. 엄마는 집에서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고요. 저 역시 '워킹맘'인데 복직을 앞두고 그런 장면을 봤을 때 많이 속상했어요."

[장하나/정치하는엄마들 대표]
"예쁜 외모의 여자아이가 사랑받고, 또 여성 캐릭터는 엄마처럼 자상하고 요리를 잘하는 게 미덕으로 그려지는 구태의연한 애니메이션에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애니메이션 제작 단계에서 성 평등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 "양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배포했지만…유명무실 가이드라인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가이드라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여성가족부에서는 지난해 '양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를 발간했습니다. 안내서를 보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남아 주인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성인 프로그램보다 성비 불균형이 심하다", "'남자는 씩씩해 적극적', '여자는 얌전해 순응적'이라는 편견이 두드러진다" 등을 지적하며 이를 개선할 걸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어 유명무실한 실정입니다.

강제성이 있는 규정도 있긴 합니다. 방송통신심의 규정 제30조에도 "특정 성의 외모, 성격, 역할 등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으로 성 역할 고정관념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지만 취재해보니 지금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애니메이션을 심의해 관련 제재를 한 횟수는 '0'건. 애니메이션의 성 평등은 아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 해외에선 규정 강화, 자정 노력…한국판 '벡델 테스트' 필요

해외에서는 일찍이 유아기에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평등한 어린이 프로그램을 만들 것을 아예 법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예컨대 호주는 2009년에 법령(방송통신서비스법·Broadcasting Service Act)으로 어린이 TV시청 기준(CTS·Children's Television Standard)을 마련해 특정 성별, 인종, 장애, 종교, 성 정체성 등 집단을 비하하거나 희화화할 소지가 있는 방송은 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어린이 방송채널을 갖고 있는 영국 BBC는 지난해 사장이 직접 나서 남자 주인공 일색인 만화가 아이들의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시킨 점을 인정, 사과하고 주요 만화 일부를 폐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신 여자 정비사가 주인공인 만화를 새로 만드는 자정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법 규정 강화나 자정 노력을 짧은 시간 안에 촉구하기 힘들다면, 참고할 만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규주 경인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벡델 테스트'를 제안합니다. 설 교수는 2016년 인권위와 공동으로 초중등 교과서 성차별 요소를 분석해 발표한 연구자입니다.

[설규주 경인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

"영화의 성평등도를 간이 측정하는 '벡델 테스트'라는 게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가 개발했죠.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라고 합니다. 첫째, 여성 캐릭터 두 명 이상이 나와야 한다. 둘째, 여성 캐릭터가 대사를 해야 한다. 셋째, 대사의 주제는 남자가 아니어야 된다. 구속력 있는 규정은 아니지만 영화를 평가하는 하나의 지표로 활용되죠.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에도 등장인물의 성비 등을 측정하는 일종의 간이 지표를 만들어서 되도록 그 지표를 통과한 애니메이션을 방영하도록 권고하면 어떨까요"


사회의 감수성은 어느새 껑충 높아졌습니다. '사내다운 남자', '참하고 상냥한 여자' 대신 자신의 기질대로, 개성 대로 자유롭게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길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갈 아이들이 접하는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수십 년 전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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