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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가하는 2차 피해"…재판 뒤 유출되는 '피해자 신상'

● [단독] "속옷 찾아가라"…성범죄 피해자 실명 관보에 공개

<앵커>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들은 수사가 끝나면 범행 증거물들을 당사자에게 돌려주게 되어있습니다. 이때 정부의 공개 게시판인 관보에 물건을 찾아가라는 공고를 올리는데 이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범죄 증거물이었던 속옷 찾아가라며 피해자 실명을 그대로 공개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이현정 기자의 단독보도입니다.

<기자>

한 지방검찰청이 관보에 게재한 압수물 환부 공고입니다. 압수물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준다는 건데 성범죄 사건의 가해자 실명과 죄명, 피해자의 실명까지 적혀 있습니다.

피해자의 이름 옆에는 찾아가라며 증거물인 속옷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이 사건 피해자는 미성년자였습니다.

또 다른 압수물 환부 공고. 장애인 성폭행 사건인데 피해자의 실명과 함께 역시 속옷을 찾아가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의 실명과 피해 내역이 그대로 공개된 관보는 국회나 대법원 같은 주요 국가 기관 게시판이나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압수물 환부 공고'는 수사기관이 압수한 물건을 돌려줘야 하는데 원래 주인에게 연락이 닿지 않을 때 게시하는 건데 3개월이 지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압수물을 국고로 귀속하거나 폐기합니다.

SBS 취재팀이 올해 게재된 천 건 넘는 압수물 환부 공고를 모두 분석해 봤더니 이렇게 성범죄 사건에서 당사자의 이름을 노출한 사례가 10건이나 발견됐습니다.

성범죄 사건이 무혐의 처분된 경우 피해를 주장하는 당사자는 물론 범인으로 지목된 피의자도 실명이 공개되는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영상취재 : 제 일·이승환, 영상편집 : 우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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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 피해자 이름 남는데 "못 고친다"…국가가 2차 피해

<앵커>

SBS가 취재에 나서자 검찰은 곧바로 실무 규정을 바꾸며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관보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는 수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범죄 피해자들 실명이 국가 공고문에 노출돼 영원히 보관될 상황인데도 원칙만 따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전형우 기자입니다.

<기자>

압수물 환부 공고에는 범행 지역과 시기까지 적혀 있어서 피해자의 신원이 특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왜 실명을 공개했냐고 묻자 대검찰청은 "압수물의 주인을 찾으려면 실명 공고가 불가피하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SBS 취재 결과 일선 검찰청의 자체 판단에 따라 가명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검찰은 뒤늦게 피해자의 의사를 수사나 재판 단계에서 확인해서 압수물을 돌려받기를 원치 않으면 폐기하는 쪽으로 규정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공개된 실명은 가리거나 가명으로 바꿔 달라고 행정안전부에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행정안전부는 "한번 공개된 관보 원본은 정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행정안전부 관계자 : 전자관보와 종이관보는 똑같아야 됩니다. 종이관보는 이미 다 (발간)되어 있는데, 전자관보(인터넷)만 고친다? 그건 안 맞겠죠.]

하지만 관련 법에 원본을 고칠 수 없도록 규정된 건 아니어서 원칙만 따질 건 아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지원/변호사 : (정부가) 행정상의 이유로 공개를 하고 수정을 거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반드시 수정하고.]

공익을 위해 만들어지는 관보가 2차 피해를 만들지 않도록 인권 관점에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영상취재 : 김세경, 영상편집 : 박춘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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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안전부 "성범죄 피해자 실명 삭제"…인권 보장 조항 신설

<앵커>

성범죄 증거물로 압수했던 속옷을 찾아가라며 피해자들의 실명을 정부 게시판인 관보에 공개하고 있다는 내용, 보도해 드렸습니다. 이름을 익명 처리하지 못하겠다던 행정안전부가 SBS 보도가 나간 뒤에 관보 규정도 고치고 인권 보장 조항도 신설하겠다고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현정 기자입니다.

<기자>

성범죄 피해자들의 실명이 관보에 노출돼 있다는 SBS 보도에 대해 행정안전부가 입장을 냈습니다.

피해자의 신원이 식별되지 않도록 보호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관보 원본은 고칠 수 없다던 입장이 하루 만에 바뀐 겁니다.

행안부는 수사기관의 공식 요청을 받아 종이관보와 인터넷 전자관보 원본에 노출된 성범죄 피해자들의 이름을 성만 남기고 익명 조치하기로 했습니다.

무혐의 처분됐는데 공개된 피의자들의 실명도 마찬가지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대통령령인 '관보 규정'도 개정할 계획입니다.

수사기관이 관보 게재를 요청할 때, 개인의 권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요청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입니다.

또, 권리를 침해당한 경우 국가를 상대로 구제를 요청할 권리도 명문화하기로 했습니다.

대검찰청도 압수물은 사전에 당사자와 논의해 폐기하거나 공고하더라도 가명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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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 판결문에 피해자 주소 버젓이…신상보호 한계

<앵커>

끔찍한 일을 당한 범죄 피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혹시 나중에라도 가해자가 자기를 다시 찾아와서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해자도 볼 수 있는 법원 판결문에 피해자가 어디 사는지 버젓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바꿀 수는 없는 건지 김기태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여성인 A 씨는 3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다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가해자는 징역형이 확정돼 수감돼 있습니다.

A 씨는 형사처벌과 별도로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내서 5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송달된 판결문에 자신의 주소가 아파트 동 호수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합니다.

똑같은 판결문이 가해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A 씨 : 무서웠어요. 정말로 저는 형사재판만으로도 솔직히 가해자가 저를 찾아올까 하는 무서움이 굉장히 컸거든요. 집 주소까지 알려지니까. 혹시라도 그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죽이지 않을까···.]

A 씨는 개명을 하고 이사까지 준비하고 있지만 내년 여름 가해자가 출소하면 자신을 해코지하지 않을까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A씨 : (가해자에게 나의 주소가 알려질 수 있다 이런 사전고지가 있었다면 조치를 했을 텐데?) 전 아마 못했을 거예요. 그러면. 민사소송을 걸지 못했을 거예요.]

이런 문제에 대해 대법원은 "민사 소송의 경우 원고와 피고를 특정하기 위해 현행법상 주소 기재는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 범죄 피해자가 낸 소송의 경우, 신상 노출을 막는 내용의 민사소송법 개정안이 올해 초 발의됐습니다.

[박주민 의원/국회 법제사법위(더불어민주당) : 형사 재판은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히 있겠죠. 그런데 민사 재판은 개인 대 개인이 돈을 받아내는 그런 관념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형사 피해자 가해자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거죠.]

가해자가 손해배상금을 주지 않을 때 법원이 강제집행을 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피해자 주민등록번호까지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실정이어서 이 부분 손질도 필요해 보입니다.

(영상취재 : 강동철·공진구, 영상편집 : 하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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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죄' 받았는데…혐의에 개인정보까지 무분별 공개

<앵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이에 대한 형사 보상금을 받게 되면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에 그 사실이 실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이름과 생년월일, 집 주소까지 개인정보가 무분별하게 공개된다는 겁니다.

박원경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A 씨는 지난해 성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무죄가 확정됐고 이를 근거로 재판에 든 변호사 비용 등을 국가로부터 보상받았습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형사 보상을 하라는 결정문이 관보에 게재됐는데 자신한테 제기됐던 구체적 혐의와 함께 이름과 생년월일, 상세한 집 주소까지 공개된 겁니다.

[A씨 : 당황스럽죠. 무죄 판결 받은 건 좋지만, 사건에 연루된 거니까 누가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고.]

현행 법규는 형사 보상을 받게 되면 당사자 의사와 관계없이 관보에 그 사실을 게재하도록 하는데 개인 정보가 무분별하게 공개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SBS가 올해 게재된 형사 보상 결정문을 모두 분석했더니 대법원을 포함해 결정문을 관보에 게재한 38개 법원 가운데 상세한 집 주소를 가린 곳은 단 1곳뿐이었습니다.

실명과 생년월일은 모든 법원이 공개했고 직업과 개명 전의 이름까지 공개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죄를 선고받고 개인 정보가 노출되는 경우가 한 해 5천여 건이나 됩니다.

[윤철한/경실련 시민권익센터 국장 : 최종판결에서 혐의가 없다고 나왔는데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정보가 노출되고 피해가 생긴다면 그분 입장에선 2차 피해가 생기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관보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에 입장을 묻자 앞으로는 관보 게재를 요청하는 기관의 개인정보 보호를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규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상취재 : 이승환, 영상편집 : 박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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