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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58 : 같이 가실래요? -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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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만두를 다 먹었을 즈음에는, 햄버그스테이크가 만두로 뒤바뀌었다는 것 따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만들어 보리라.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치매의 'ㅊ'도 몰랐던 나는, 배가 덜 찼는지 연신 젓가락을 물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서 그렇게 다짐했다."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이 서빙하는 음식점이 잠깐 문을 연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잔잔한 화제가 됐는데, 혹시 들어보신 적 있나요.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책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선 8월 1일에 출간돼 한 달 만에 3쇄를 찍은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입니다.

단 이틀 동안의 이벤트성 프로젝트였지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 요리점을 방문한,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크고 작은 파문이 일어 지금도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치매라는 병의 현상, 더 넓게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서 한번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계기.

이 책은 그런 모퉁이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묶어 말을 건네옵니다.

"노인 걸음이라 다행히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다. 곧바로 뒤따라가 저만치 먼 거리에서 요시코 씨를 관찰하고 있자니, 그녀는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급하게 살 물건이 있었나.' 계속 지켜본 결과,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과자와 잡지였다. 카운터 앞에서 요시코 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그 안에서 돈을 꺼내 접시 위에 두었다. '어? 혹시 지난번 사례금?'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일한 사례로 받은 돈을 들고, 요시코 씨는 편의점으로 달려온 것이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돈이 자신이 오랜만에 일을 해서 번 대가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맛있는 과자와 읽을거리를 살 수 있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물건을 사는 요시코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복지팀 서포터)

아무래도 이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치매 노인들도 그렇지만 그들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 요리점을 방문한 손님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평생을 함께 연주해 온 피아니스트 아내가 밥솥을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하는 첼리스트 남편,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요식업자,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모처럼 즐거운 외식을 할 수 있었던 그 아들.

말기 암 환자로 부모와 살고 있는 30대 디자이너와 그의 베스트 프렌드.

"나는 지금 4기 암을 앓고 있다. 오늘 나는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나의 병과 치매라는 병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잃는다'는 것. 암을 앓게 되면서 외관적인 것,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여러 가지 선택,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등 여러 가지를 '잃는' 경험을 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분들 역시 기억을 잃고,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잃고 있으리라. 암에 걸렸으니까 포기해야 한다. 치매니까 마음을 접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따금, 악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암 환자인 나는 오늘,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장 친한 친구와 너무나 멋진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식사를 즐겼다. 물론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많은 것을 잃었다지만 여전히 주변 사람들과 사회와 이어져 있다. 이어져 있어서 좋다. 그 사실을 구체적인 형태로 명확하게 해준 것이 바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나카지마 나오 씨, 디자이너)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치매 노인들에게 서빙을 맡긴 이 요리점이 단순히 '치매 환자 복지 포르젝트'가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겨준 여운을 담담히 들려줍니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기획한 방송사 PD 오구니 시로 씨부터 한창 일할 30대에 중한 심장병을 얻게 돼 자신의 TV 프로그램을 맡을 수 없게 된 뒤 이 요리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TV 프로그램 연출을 맡을 순 없지만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서 이런저런 기획을 하다 보니 오히려 방송사 안에 자신이 지휘하는 전담 팀까지 생겨 일을 하게 됐고, 결국 세계가 주목하는 요리점 프로젝트까지 내놓게 됐습니다.

병이 사람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병을 안고 살아가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서로 애정을 갖고 돕는다는 것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보여준 일이라 그토록 주목되지 않았을까요.

오구니 시로 PD는 '치매 간병계의 이단아' 와다 유키오 씨와 그의 시설을 취재한 뒤, 자신은 '치매'에 대해 대충 알고 있는 걸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고백합니다.

치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편견이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아주 모르는 게 아니라 조금 알고, "대충 알 때",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가능성을 자신도 모르게 일찌감치 닫아버리고 그냥 전체에 대한 판단을 내려버리는 거죠.

와다 유키오의 철학은 '치매 환자들도 인간적인 생활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데까지 자립할 수 있는 최대한 자유로운 인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치매 환자에 대한 우려나 공포에 압도돼 (간병하는 쪽이 편하도록) 치매환자를 관리 대상으로 처분해 버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병 진도와 개성에 맞춰 보조하는 게 바로 전문가들이 해야 할 몫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문가 스스로가 좀더 어려운 과제에 끊임없이 맞부딪치지 도전하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 없는 그 철학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실수합니다.

"'치매'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나도 당연히 이 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대충 알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 위험한 것이다. '치매란 이런 거야' 하고 막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대충 알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와다 씨는 치매를 벌레가 달라붙어 있는 것에 비유한다. 사람에게 치매란 벌레가 달라붙어 있는 것일 뿐,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 거기에서 시작하라고. 와다 씨에게 배우고 난 후 다시 그룹 홈을 바라보자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깜짝 놀랐다. 운동신경이 좋고 늘 생기발랄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요리를 잘해서 멋진 칼 솜씨를 보여주는 분도 있다. 말을 잘해서 사람들을 늘 웃게 해주는 분도 있고, 야한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거기에 치매라는 병이 붙어있기 때문에 조금씩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건망증이 심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무조건 밖으로 나도는 사람도 있고 폭언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백이면 백 언제나 늘 그런 사애인 것은 아니다. 그런 셩향이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 이를테면 치매라 해도 단색이 아니라 사람들 저마다 다른 색깔과 명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치매 환자이기 이전에, 사람.' 와다 씨는 이 사실을 지역 주민이나 행정 단체에 거듭 알리면서 조금씩 협력의 범주를 넓혀온 것이다." (오구니 시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기획자 겸 주 저자)

이 책을 읽고 난 지금도 저는 치매 노인 간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저도 모르게 갖고 있는 편견을 편견으로 인정하고, 나는 참으로 모르고 있으니 좀더 얘기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구니 시로 PD가 중한 심장병을 앓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배반하고 더 활발한 활동을 펼친 덕분에 이런 멋진 식당이 탄생했으니, 문득 틀려버려 나온 또다른 맛있는 요리처럼, 이것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낭독을 허락해 주신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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