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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CA 요원 아들 잃은 아버지들 "바라는 건 최소한 예우뿐"

KOICA 요원 아들 잃은 아버지들 "바라는 건 최소한 예우뿐"
"컴컴한 터널 앞에 있다가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느낌입니다. 병역 이행 중 사망했다면 국가에서 인정을 해줘야 다른 사람들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지 않을까요" (설희태 씨)

"지금도 군인들만 지나가면 내 큰아들인가 하고 정신병자처럼 쳐다보게 돼요.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국가를 위해 일하다 죽었다는 떳떳함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어요" (김강현 씨)

장성한 아들을 각각 군에서 잃은 아버지 두 명은 앞서 간 자식들이 뒤늦게야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길이 열린 데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인권위는 이달 9일 열린 제29차 상임위원회에서 '사망한 국제협력요원의 국가유공자 심사대상 포함 등을 위한 의견표명 및 제도개선 권고안'을 의결했다.

인권위는 국회의장에게 국제협력요원이 국가유공자 심사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국가유공자법)' 일부 개정안을 심의해줄 것 등을 촉구하는 의견을 냈다.

국가보훈처장과 병무청장에게는 해당 법률의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국제협력요원은 옛 병역법과 국제협력요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병역의무 대상자 중 일정한 자격을 갖춘 지원자를 선발해 군사훈련 후 개발도상국에 파견하는 제도다.

외교부 산하 정부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에서 이들 요원을 파견했지만 관련 법이 폐지되면서 현재는 사라졌다.

국제협력요원은 병역의 하나였는데도 당시 병역법 조항 때문에 국가유공자법의 심사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는 가슴을 칠 일이다.

설 씨의 아들 동진 씨는 1974년생이다.

연세대 경영대학원 박사과정 수료를 한 학기 남기고 징집 연령 제한에 따라 2002년 3월 입대했다.

당시 아내와 2001년에 태어난 딸을 뒀던 동진 씨는 육군 제20사단 신병교육대에서 4주간 교육을 받은 뒤 그해 8월 코이카 국제협력요원으로 카자흐스탄에 파견됐다.

복무 기간 동진 씨는 구한말 조선인들이 강제 이주한 카라간다시 소재 카라간다국립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학교 당국과 협의해 교내에 한국어학과를 만드는 데 주력하는 등 성실하게 복무했다는 게 아버지 설 씨의 설명이다.

비극은 복무 기간 만료를 한 달가량을 앞두고 벌어졌다.

동진 씨가 2004년 9월 7일 자택에 침입한 2인조 강도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병역의 하나로 명백히 나라의 부름을 받고 간 것이지만, 병역법상 국가유공자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탓에 동진 씨는 단순 사망 처리됐다.

아버지 설희태 씨는 20일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었는데 그 공을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지금처럼 나라에서 책임을 져주지 않을 거면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을 자르고, 팔뼈를 부러뜨려서라도 군대에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설 씨는 아들 동진 씨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달라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던 국가에 대한 서운함을 여과 없이 토해냈다.

그는 "외교부는 '안타깝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립서비스만 하고 국가보훈처 핑계를 댔다"며 "병역법에 따라 입대했는데 병력 운용 주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 심사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무슨 편협한 논리냐"고 비판했다.

설씨 옆자리에 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김강현 씨는 자신의 아들 사연을 이야기할 때는 언성이 커져만 갔다.

김씨는 장남 김영우(1990년생)씨를 비명에 보내고 국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분은 세월이 가도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했다.

김 씨는 인터뷰 때도 기자에게 연신 "이런 식으로 말해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분을 삭이지 못했다.

영우 씨는 만 20세이던 2011년 3월 논산훈련소로 입소해 그해 6월 국제협력요원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됐다.

대학에서 자동차 정비학을 전공한 영우 씨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가난한 주(州)로 꼽히는 우바주에서도 오지인 산간지역 반다라웰라의 한 기능대학에 배정됐다.

영우 씨는 학창 시절 각종 대회에서 60여 차례 입상했고, 과학기술부 장관상도 받을 만큼 학업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국제협력요원으로 복무하던 동안에는 현지 적응을 위해 '다함'(Daham)이라는 현지 이름을 짓고, 스리랑카어 학습에 매진했다.

그 결과 2011년 11월 파견 석 달 만에 현지 기관장 평가회의에서 현지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국영방송과 현지어로 인터뷰까지 해 전국 방송에 탔다.

순탄하게 군 복무를 하던 영우 씨는 2012년 10월 근무 중 불의의 낙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영우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 김황식 전 국무총리, 강창희 전 국회의장까지 애도를 표했다.

김 씨는 "둘째 아들이 이번 달에 전역한다"며 "첫째 아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둘째는 군에 보내기 싫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미국은 6·25전쟁 참전 병사들의 시신을 60년이 지나고도 책임지는데 우리 아들은 국제협력요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순 사망 처리됐다"며 "이렇게 하면 대한민국 어느 부모가 자긍심을 가지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겠느냐"고 성토했다.

김 씨는 "외교부 관용 여권을 들고 해외에 나가 일했는데도 국가에서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따져 물으며 "코이카에서 순직이라고 판단하는데 외교부, 보훈처, 병무청에서는 단순 사망이라고 하는 건 사람 놀리는 게 아니고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두 아버지는 아들 둘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점을 인정해달라고 입을 모아 읍소했다.

(연합뉴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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