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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속도'위해 '단절' 택한 국도, 지역침체 가속원인

단절된 옛 국도 주변, 회복작업 병행해야

[취재파일] '속도'위해 '단절' 택한 국도, 지역침체 가속원인
외진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에겐 길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길이 난다는 소문에 동네가 들썩이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대부분의 중장년층에겐 아련히 남아 있다. 길은 개발과 발전의 원동력이었고, 시골 아이들에겐 도시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기회의 통로였다.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근처에 길이 나면 사람이 몰리고 그 덕분에 장사가 잘 되며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 가계를 튼실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래서 길이 난다는 건 모두에게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동네에 길이 났는데 그 옆에 더 큰 길이 생겼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선거 때마다 큰 길을 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SOC 투자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며 해마다 고속국도 건설계획이 발표됐다.

동네 주변에 길이 더 많이 생겼는데, 이상하게 동네는 활력을 잃어갔다. 예전에는 길이 나면 사람이 몰렸는데 이번엔 왠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외지인 방문도 줄어갔다. 큰 길이 생기고 나서 어딘가는 상권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우리 동네는 몰락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길이 났다고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 지난 것이다. 새 길의 끝단에 여행객이 몰리면서 그 주변이 쾌재를 울리는 이른바 '분산효과'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대도시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현지에서 이뤄질 소비가 대도시로 옮겨가 버리는 이른바 '빨대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새 길 때문에 찬밥 신세가 돼 교통량과 유동인구가 크게 줄어든 옛 길에선 더 심각한 지역경제 침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완전개통 1주년을 맞은 서울양양 고속도로 때문에 교통량이 70% 이상 줄어든 44번 46번 국도의 경우다.

이들 도로들은 예전 휴가철엔 속초를 비롯한 강원 동북부로 피서가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 지난 7월부터 서울-양양고속도로 가운데 동홍천에서 양양까지의 구간이 추가 개통하면서 옛 도로의 교통량은 급감했다. 교통량이 줄면서 경로 상에 있는 휴게소들의 매출 역시 70% 이상 줄었고, 옥수수나 황태 같은 농수산물을 팔던 인근 주민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마을 전체가 새 도로 개통 때문에 직격탄을 맞은 경우도 있다. 황태축제로 유명한 인제군 용대리의 황태마을은 예전에 미시령으로 넘어가기 직전 수많은 피서객들이 잠시 쉬어가던 명소였다. 예전 이맘 때 여름 성수기엔 주변을 지나는 피서객들이 들러 황태나 산나물 같은 상품들을 구매하면서 대목을 누렸지만 불과 1년 남짓 지난 지금, 옛 영화는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썰렁한 분위기다. 예상보다 더 큰 매출감소에 충격을 받은 주민들은 주변 산에다 출렁다리와 짚라인 같은 즐길 거리를 설치하는 등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면, 고개 넘어 속초와 양양 일대는 고속도로 개통에 따라 접근성이 월등히 좋아졌다. 덕분에 외부 관광객의 유입이 크게 늘어나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 영향으로 일대 땅값이 1년 새 10% 이상 올라 도내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렇게 새 도로가 뚫리면 옛 도로나 그 주변지역이 반드시 손해 볼 수밖에 없는 현상은 우리나라 도로 설계방식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속도를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새 국도가 설계되면서 불가피하게 지역을 서로 차단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자동차가 빨리 달리도록 옛 도로를 비롯한 주변과의 연계성을 줄이거나 차단함으로써 목적지 도착시간은 줄였지만, 대신 새 도로에서 비껴난 지역의 침체와 지역 간 단절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제 전국적으로 도로건설이 완성단계에 들어선 만큼, 이제는 새 국도 건설에 따라 침체되거나 단절된 지역경제의 회복을 위해 신경을 써야 될 때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방법으로 우선 옛 도로의 경쟁력 있는 명소를 잘 알리고 쉽게 찾아갈 수 있게 연계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더불어 옛 도로 주변의 주민들과 지자체 역시 지역특성을 활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볼거리나 먹거리 명소를 만들 필요가 있다. 요즘 여행의 경향을 보면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곳은 도로의 접근성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찾아가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의 진화도 필요한 부분이다. 현재 단시간 주행 위주로 돼 있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좀 더 정교하게 설계해, 볼거리나 먹거리 명소가 우회로에 있다는 걸 적극적으로 보여줄 경우 옛 국도를 살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중장기적으론 인구학적 관점에서 도로설계에 접근할 시점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역경제 침체에다 인구감소를 감안해 일본처럼 기존 도로 주변의 쇠락한 동네를 정리하고 특정 지점에 새 주거단지를 만드는 작업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도로는 산업과 생활의 핏줄이다. 도로 신설과 관리에는 연간 수조원씩 국민이 낸 세금이 투입된다. 침체된 옛 도로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 도로 예산을 꼭 써야 할 곳에 효율적으로 투입하는 것은, 바로 국가 경제의 혈관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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