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또' 부적절했던 대법관 입장 발표

류란 기자 peacemaker@sbs.co.kr

작성 2018.06.17 11:26 수정 2018.07.06 09:2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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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후 배포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한 대법관들의 입장'은 여러모로 예상 밖이었다. 발표 시점(오후 4시 10분)부터 그랬다. 불과 2시간 30분 전, 김명수 대법원장이 '수사 협조'를 공언한 상황에서 '재판 거래 의혹은 근거 없고 국민들에게 혼란을 줘 우려스럽다'는 엇박자의 목소리가 같은 법원 안에서 나온 것이다. 고발이 아닌 수사 의뢰나 협조만으로도 향후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법관들이 오히려 시원하게 심증을 확인해준 셈이 됐다.
<대법관 입장 발표문(2018.6.15)>'대법관들 모두가 재판의 독립에 관하여 어떠한 의혹도 있을 수 없다는 데 견해가 일치했다'는 대목에선 현재 사법부가 처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얼마 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택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이 연상됐을 정도다. 법원 자체 조사에 근거한 의혹 제기에 대해 책임 있는 고위 법관들이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매우 부적절했다.

입장문엔 참여한 대법관들의 인원이나 명단 같은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마지막 '대법관 일동'이 다였다.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대법원은 '13명 현직 대법관들이 함께 낸 것'이라고 확인했다.
<대법관 입장 발표문 (2018.6.15)>대법관 13명은 다음과 같다.

고영한 (2012.08~ 대법관)
김창석 (2012.08~ 대법관)
김  신 (2012.08~ 대법관)
김소영 (2012.11~ 대법관)
조희대 (2014.03~ 대법관)
권순일 (2014.09~ 대법관)
박상옥 (2015.05~ 대법관)
이기택 (2015.09~ 대법관)
김재형 (2016.09~ 대법관)
조재연 (2017.07~ 대법관)
박정화 (2017.07~ 대법관)
안철상 (2018.01~ 대법관)
민유숙 (2018.01~ 대법관)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고영한 대법관이다. 고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2016.02~2017.05)이었던 지난해 3월, 언론보도를 통해 판사 뒷조사 문건 의혹이 처음 불거졌다. 고 대법관은 이후 해당 의혹을 제기한 이탄희 판사에 대해 "본인 의사에 따라 겸임해제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법원 내부의 빗발친 요구로 진상조사가 시작됐고(2017.03), 이 판사의 겸임해제가 이규진 당시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부적절한 요구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이 발표됐다(2017.04). 대법원 공직자윤리위도 이 전 상임위원이 사법개혁 학술대회를 축소하기 위해 이탄희 판사를 압박하고,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견제하기 위해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를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고 대법관이 이 전 상임위원의 관련 보고를 받고 적정성 등에 대해 우려를 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주의 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2017.06).

고 대법관은 또한, 전임자인 박병대 전 대법관과 함께 문제가 된 문건들이 작성되던 시기 법원행정처를 이끌었던 주요 당사자로 언급된다. 도의적인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신이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검찰 조사 대상자가 될 수 있다.

김소영 대법관은 고 대법관의 후임으로 법원행정처장(2017.07~2018.01)을 역임했다. 김 대법관이 처장직에서 사임하던 당시 일부 언론들이 '김명수 대법원장의 코드인사'라고 비판하며 '김 대법관이 추가조사위의 요구에도 임종헌 전 차장의 PC 조사를 거부한 것이 교체 원인이 됐다'고 보도했다. 실제 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해당 PC에선 수많은 사법행정권 남용, 그리고 재판거래 의혹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 법원행정처장(2018.02~)이기도 한 안철상 대법관은 최근까지 특별조사단의 단장을 겸임했다.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대법원 재판을 설득·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 정황'을 밝혀낸, 바로 그 조사단이다. 그런 그가 다른 대법관들과 함께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재판사무에 원천적으로 관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입장을 냈다니 의아하다. 결국 앞서 특별조사단의 결론이란 것도 '원천적으로 불가한 일을 열심히 시도한 법관들이 하릴없이 싱거웠다'였을까? 그도 아니면, 정황은 있지만 실행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모두 '미수'로 보자는 걸까?

대법관들의 입장 발표가 부적절했던 이유는 또 있다. 이들은 의혹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당사자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의 경우 6명의 대법관(이기택, 김재형, 조재연, 박정화, 안철상, 민유숙)이 관련 문건의 작성 사정을 알 수 없다. 해당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됐던 2015년 7월엔 대법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KTX 해고 승무원 복직'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 소송도 사정이 비슷하다. 재판을 맡았던 대법관은 현재 2명만 남은 상태다. 

대법관들이 일방적으로 무고를 주장하는 입장문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추가조사위 결과 발표(2018.1.22) 다음 날에도 비슷한 대응을 한 적 있다. 원세훈 재판 의혹이 처음 불거진 때였는데, 심리에 임하지 않았던 대법관 6명이 '전원 명의' 입장문에 참여한 것에 대해선 두고두고 비판이 나왔다.

...관여 대법관들은 재판에 관하여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일부 언론의 위와 같은 보도는 사실과 달라 국민들과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에 관한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
 -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대하여' 13명의 대법관 입장 발표 (2018.1.23)
 
남의 일인 양 우려를 표현하는 이런 발표야말로 의혹을 더욱 키울 뿐이란 사실을 모르는 걸까. 검찰 수사를 앞두고 방해 행위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것도. 대법관 전원이 심증을 밝힌만큼 향후 상고심이 이뤄질 경우 전원 회피 사유가 될 것이란 말도 나온다. 덕분에 '재판은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정해 보여야 한다는 덕목에 비춰 의혹만으로도 국민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수사 협조 방침을 밝힌 대법원장이 굉장히 상식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 측면이 있긴 하다.